남은 건 석인상뿐… 죽어서도 안식 못했던 ‘비운의 왕’

 

무신 최충헌 손아귀서 못 벗어나

내시와 암살 시도 실패… 유배형

복위 시도 무고로 가중처벌 받아

끊임없는 도굴과 훼손에 시달려

석릉 전경. 2025.8.1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석릉 전경. 2025.8.1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고려시대에는 사람이 죽은 뒤 묫자리를 쓸 때 풍수지리에 따른 명당을 골라 택했으며, 장례 기간도 무척 길었다. 왕이나 그 가족의 경우 묫자리를 택하는 기준이 더욱 엄격했을 터이다. 그 고려시대 왕 또는 왕후의 무덤이 강화에 4기가 있다. 석릉, 가릉, 곤릉, 홍릉이다. 이는 명확하게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인되는 경우만 그렇다. 고려시대 왕들은 실제로 명당 자리에 묻힌 것일까.

지난 11일 오후, 강화 천도 시기 가장 먼저 조성된 왕능인 석릉(碩陵)을 찾아나섰다. 내비게이션에 ‘석릉’을 입력하니 목적지를 친절히 안내했다. 차량으로 갈 수 있는 막다른 곳에 다다르니 석릉 가는 길을 알리는 안내판이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차에서 내려 산길로 들어서 걸어야 한다. 야트막한 산을 올라야 한다. 2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다. 그래도 땀은 비오듯 쏟아졌다.

석릉 가는 산길을 오르다 보면 고인돌을 만나게 된다. 이름하여 ‘도장리 어두고인돌’. 고인돌의 주인공도 그 옛날의 권력자였을 것인데, 고인돌의 시대나 고려시대나 ‘왕들의 무덤 쓰는 자리는 따로 있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장마철, 찾는 사람이 없었는지 산길 곳곳에서 거미줄의 방해를 받았다. 그렇게 찾아간 석릉. 800년의 세월 온갖 풍상을 겪은 무덤은 말이 없었다. 능의 주인공은 희종(熙宗, 1181~1237). 고려 제21대 왕이다. 희종은 참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희종은 1204년에 즉위했는데, 이때는 무인집권기 최고의 실세 최충헌이 나랏일을 마음대로 하고 있었다. 허수아비 왕 노릇을 7년 동안이나 하던 희종은 1211년, 최충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시 왕준명 등과 최충헌 암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다. 왕이 신하를 죽이려 한 것이 마치 신하가 왕을 암살하려 한 역모죄처럼 다스려졌다. 희종은 강화도, 자연도(紫燕島, 영종도) 등지로 유배형이 내려졌다. 그는 또 1227년에는 최충헌의 아들 최우에 의해 복위를 시도했다는 무고를 당해 교동의 법천정사(法天精舍)로 또다시 옮겨지는 가중처벌을 받았다. 거기서 10년을 살다 세상을 떴다.

희종의 사망 사실과 장례 이야기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간략하게 전한다.

“(최)충헌이 왕을 폐하여 강화현으로 옮겼다가 뒤이어 자연도로 옮기고, 태자 지(祉)를 인주(仁州, 현 인천)에 추방하고 한남공 정(貞)을 세웠다. 고종 24년(1237) 8월 무자(戊子)에 왕이 법천정사(교동)에서 훙(薨, 사망)하니 낙진궁(樂眞宮, 강화도)으로 빈(殯, 빈소)을 옮겼다. 재위 7년에 수(壽)가 57이며 … 능(陵)을 석능(碩陵)이라 하였다.”

‘고려사’의 이 짤막한 부음 기사 뒤에는 사관(史官)의 평도 달아놓았다. “… 한때의 분함을 풀려 하다가 마침내 방출을 당하게 되었으니 슬프도다.” 무신정권에 맞서 왕권 회복을 도모했으나 끝내 실패하고만 희종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긴 대목이다.

석인상. 2025.8.1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석인상. 2025.8.1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고려시대 왕들의 무덤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마는 희종의 석릉 역시 도굴의 피해를 벗어나지 못했다. 능 안에 온전히 남아 있는 부장품이 없다시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몇 차례 발굴 결과 귀중한 부장품이 묻혀 있었다는 사실이 일부 깨진 조각들에 의해 드러났다. 각종 청자 조각, 금을 칠한 조각, 14면으로 깎아 멋을 낸 쇠로 만든 14면체 정(釘) 등이 출토되었다. 엄청나게 화려했을 온전한 물건들은 도굴꾼들의 몫이 되었던 모양이다.

지금의 묘역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고려시대 유물은 능을 지키는 2기의 석인상(石人像)뿐이다. 둘 다 문인석으로 보이는데, 그나마 하나는 머리와 몸체가 두 조각으로 분리되어 있다. 끊임없는 도굴과 훼손, 고려의 왕들은 죽어서도 편안할 수가 없었다.

내려오는 발걸음이 못내 무거웠다. 그 발걸음에 놀란 것인지 주먹만 한 두꺼비가 폴짝 뛰어 달아났다. 그 바람에 기자도 또한 깜짝 놀라 가슴을 쓸어내렸다. 돌아서서 다시 보니 두꺼비가 석릉 지킴이처럼 보였다. 두꺼비한테 미안했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