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쇼핑은 사람이 검색하고 비교하며 스스로 결정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제 소비는 사람보다 AI의 손끝에서 먼저 시작된다. 추천 상품을 무심코 클릭하고, 챗봇에게 정보를 묻고, AI가 짜준 여정대로 여행을 계획하는 소비자들. 우리는 이러한 소비자를 ‘AI 소비자’라고 부른다.
이는 기술 변화 그 이상의 의미다. 소비자의 행동 양식과 의사결정 구조 자체가 달라졌다는 방증이다. AI는 취향·구매 이력·검색 기록을 분석해 정밀하게 개인화된 추천을 제공한다. 피부톤과 타입을 입력하면 어울리는 색조 화장품을 추천하고, 방 구조를 분석해 적절한 가구를 자동 배치해 보여준다.
‘나에게 딱 맞는 상품’은 더 이상 우연이 아니다. 알고리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소비 경험을 설계한다.
하지만 편리함 이면엔 역설이 있다. 사고는 단순해지고 선택은 넓어진 듯 좁아진다. 소비자가 AI를 활용하는가. 아니면 소비자 자신이 AI에 의해 소비되어가는가. AI 소비자들은 겉으론 편리하지만 속으론 불편한 이중적 현실을 살아간다.
많은 기업들이 도입한 AI 챗봇은 정형화된 응답만 반복하고 오히려 짜증을 유발한다. ‘AI는 감정을 읽지 못한다’는 지적은 소비자 신뢰의 부재를 의미한다. 더 큰 문제는 개인정보에 관한 우려다. 앱을 쓸 때마다 검색 기록, 관심품목, 위치 정보가 수집되지만 소비자에겐 이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AI는 결국 인간이 설계한 도구다. 이 설계에 편향이 반영되면 AI는 차별과 불공정을 재생산한다. 소비 이력에 따라 고소득자 위주 추천이 반복되고 일부 소비자는 혜택에서 소외된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보호 장치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소비자는 지금 ‘알고리즘의 바다’에서 부표도 없이 표류 중이다.
AI 기술의 최우선 과제는 ‘투명성’이다. AI 판단에 어떤 데이터가 사용됐는지, 분석 기준이 무엇인지 소비자가 요구할 때 기업은 응답해야 한다. 이것은 소비자의 권리다. 동시에 소비자도 AI 리터러시를 갖춰야 한다. 어떤 데이터가 수집되고 AI는 어떻게 결정하며 이를 거부하거나 수정할 권리는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정부와 기업은 소비자 교육과 정보 제공을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현행 소비자보호법은 AI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AI 시스템이 초래한 피해에 대해 책임을 묻고, AI가 편향된 판단을 내렸을 때 소비자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법제 정비가 시급하다. ‘AI 소비자 보호법’이 필요한 이유다.
AI 소비자는 단지 기술 사용자에 머무르지 않는다. 데이터 수집, 알고리즘 편향, 챗봇 응대 품질, 설명 책임을 감시하는 주체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소비자의 감시력도 정교해져야 한다. AI가 ‘설계된 친구’, ‘훈련된 조력자’임을 인지할 때 비로소 AI와 소비자의 관계는 건강하게 정립된다.
AI 소비자의 시대는 이제 막 열렸다. 진정한 AI 소비자는 단순히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통제하고 질문하며 책임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소비자가 더 많이 알고 똑똑해질수록 AI는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한다. 이것이 바로 공존의 조건이며 우리가 향해 가야 할 새로운 소비자 사회의 모습이다. 이 여정의 시작은 단지 ‘편리함’이 아니라 ‘깨어 있음’에 있다.
/박순장 칼럼니스트·前 소비자 주권시민회의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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