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강도는 일제 그대들… 나는 인천바다 누빈 협객이오
중국서 살다 3·1운동 계기로 독립 관심
1923년 동료 9명과 인천 부호들 찾아가
섬 돌며 ‘임정 독립공채’ 주고 현금 받아
“독립운동에는 돈이 필요하다. 과격한 방법을 쓸지라도 구해야 한다.”
독립운동가들이 중국과 조선을 오갈 수 있는 선박을 구해오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조선에 도착한 윤응념(1896~?)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되뇌었다. 윤응념은 미국 유학을 꿈꾸며 중국 즈푸(현 옌타이)에서 살다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고국의 독립에 관심을 갖게 됐다.
윤응념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손정도(1882~1931) 교통총장을 보좌하며 교통부 참사(參事)직을 맡았다. 그는 손 총장의 지시를 받고 인천과 서울 등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자 분주히 움직였다. 하지만 3·1운동 이후 일제의 강경한 탄압과 삼엄한 감시 탓에 독립운동 자금을 기꺼이 내놓는 이를 찾긴 어려웠다. 결국 윤응념은 권총으로 부호들을 위협해 자금을 모으기로 결심했다.1 그렇게 배를 타고 인천 섬 곳곳을 돌며 인천의 부호들을 겁에 질리게 한 윤응념의 활극이 시작됐다.
■ ‘해적괴수’ 윤응념, 인천 부호들 전율케하다
윤응념은 곧바로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나루터로 향했다. 그가 즈푸를 떠나기 직전, 동료 이성춘이 남긴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성춘이 알려준 대로 나루터 주변 도로를 파헤치자 땅속에 묻혔던 권총 2자루와 탄환 200발을 찾을 수 있었다. 이후 윤응념은 인천과 황해도를 돌아다니며 동료를 모았고, 윤응념과 9명의 동료는 그렇게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는 임시정부 요원이다. 독립운동 자금 500원을 내놓아라!” 1923년 1월26일,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윤응념, 이호승, 윤도중이 경기도 부천군 계남면 한 마을(현 부천시 춘의동)로 조용히 들어섰다. 500원은 당시 서울 한복판에 있는 한옥 한 채 값에 맞먹는 거금이었다. 박주순의 집에 침입한 이들은 권총과 임시정부가 발급한 여러 문서를 보여주며 돈을 내놓으라고 했지만, 그의 집에는 돈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의 첫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2
몇 주 뒤인 3월2일 밤 10시 인천 만석정 해안에서 윤응념과 이동진은 품 안에 파고드는 바닷바람을 견디며 초조한 표정으로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밤바다에서 최수연이 끌고 온 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배에 몸을 싣고 부천군 북도면 장봉리(현 옹진군 장봉도)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이들은 윤응칠의 집을 찾아가 500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지만, 그에게 10원만 받아낼 수 있었다. 같은 날 고기원의 집에도 찾아가 독립운동 자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으나 실패했다.
실패가 이어지자 이들은 방법을 바꿨다. 배를 타고 시도, 영종도, 대부도 등을 돌며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했고, 집 안에 현금이 없다면 추후에 돈을 주기로 하는 서약서를 작성하게 했다. 자신이 임시정부 구성원이라는 것을 알리고 권총을 보여주며 현금 600원과 3천원의 서약서를 받아냈다.
윤응념은 현금을 받고 이들에게 임시정부의 ‘독립공채’를 발매해줬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채권을 발행했다. 이 채권을 소지한 이들에겐 조선이 독립한 뒤 5~30년 사이에 해당 금액을 상환하기로 약속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지금도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공채에 대한 상환을 이어가고 있다.
마침내 이들은 배 한 척을 사는 데 성공한다. 4월20일, 이들은 인천 중구 송월동에 있는 한 조선소에서 350원을 주고 범선 한 척을 샀다. 이후 100원을 들여 배를 고친 뒤 단원의 일부는 이곳에서 머물렀다. 평소에는 다 함께 모여 회의를 열었다.
체포뒤 오히려 경찰 꾸짖는 당당한 태도
“목적은 오직 조선 독립, 협박 없었소”
전국 큰 관심… 항소끝 징역 15년 선고
건강 나빠져 보석, 감시 뚫고 중국으로
■ 조선을 뒤흔든 ‘인천 중대사건’에 쏟아진 관심
“경찰 자네들도 우리 같은 사람 때문에 고생하니 미안하군.”
5월1일 윤응념과 동료들은 박주순의 집에 갔다 돌아가는 길에 잠복해 있던 인천경찰서 형사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경찰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권총 2자루와 탄환, 독립공채 등을 발견했다. 윤응념은 경찰에 체포되는 와중에도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경찰관들을 꾸짖기도 했다. 조사를 받는 와중에도 항상 미소를 띠며 대답하는 윤응념의 모습에 일제 경찰과 검사들도 크게 당황했다. 이들의 활약은 조선 전체를 뒤흔들었다. 언론은 이 사건을 ‘인천 중대사건’이라 부르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경기도 경찰부는 이들을 서울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하며 자세한 사건의 전말을 공공연하게 발표하기에 이른다. 1923년 10월29일 오전 10시, 인천지방법원 제7호 법정에서 윤응념 등 인천 중대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낡은 두루마기를 입은 윤응념이 선두에 섰다. 다른 이들은 미결수가 입는 푸른색 수의를 입고 법정에 출석했다. 5개월간의 옥고로 인해 이들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3
이날 아침부터 많은 시민이 법원에 모여들었다. 법정은 방청객들로 미어터졌고, 법정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간 이도 다수였다. 이날 방청석엔 유독 앳된 얼굴의 학생이 많았다고 한다.
윤응념은 검사가 기소한 범죄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동정심을 자극해 자금을 모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적은 오직 조선 독립뿐, 협박을 한 일은 없었소. 민족을 위해 일하는 자가 민족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그는 이 근본을 잃어버리는 것 아니겠소.”4
최후 발언에선 어려서부터 중국에서 공부하다 이제야 조선에 돌아왔다며 젊은 나이에 옥중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서글프고 원통하다 외쳤다. 마치 피를 뿌리는 듯한 그의 외침에도, 일제 재판부는 그에게 징역 12년과 벌금 300원을 선고한다.
■ “나는 이미 장춘에 와 있소” 일제 경찰을 따돌리다
항소 끝에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윤응념은 1925년 5월13일 형 집행정지 결정을 받아 보석으로 석방된다. 그의 폐결핵이 악화돼 감옥에선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서대문경찰서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은 매일 그를 따라다니며 감시했다.
“윤응념이 사라졌다!”
그가 보석 석방된 지 4개월 뒤인 9월19일, 윤응념은 돌연 자취를 감췄다. 그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도망쳤다는 소문이 퍼지자 서대문형무소는 윤응념은 입원 후 단 한 번도 병원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가 잠시 인천에 다녀온다는 말을 남기고 병원을 떠난 사실이 확인됐다. 서대문·종로경찰서 경찰관들은 깜짝 놀라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으나 작은 단서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부인 김향엽에게는 “재판부의 호출이 있어 잠시 가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행적을 감췄다.5
그러던 중 서대문경찰서 고등계로 중국 장춘에서 보낸 엽서 하나가 도착했다. 이 엽서에는 ‘나는 지금 장춘에 와 있다. 성대한 은혜(경찰의 감시와 배려)에 깊이 감사한다’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경찰은 크게 분노했으나 윤응념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윤응념은 가족들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그는 ‘날이 갈수록 병이 심각해진다. 다시 감옥에 들어가면 곧 죽을 수 있어 먼 곳으로 간다’며 아내에게 두 아이를 잘 키워달라는 부탁을 남겼다.6 이후 그가 다시 조직을 꾸려 독립운동을 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이어졌지만, 이후 그의 행적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김마리아 등 독립운동가 밀항 돕기도
오토바이에 태워 인천으로 ‘신출귀몰’
中탈출 행적 끊겨 유공자 인정 못받아
■ 오토바이 탄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탈출 작전
윤응념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안전하게 중국으로 밀항시키는 역할도 맡았다. 그는 3·1운동 이후 독립운동가 11명을 안전하게 중국으로 탈출시켰는데, 그 실력이 뛰어나 마치 ‘귀신’ 같았다고 한다.
1921년 찌는 듯이 더웠던 8월,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옥고를 치르던 김마리아(1891~1944)를 중국으로 탈출시키기 위한 작전이 시작됐다. 김마리아는 당시 질병으로 보석됐으나 집에서 4㎞ 이상 나가려면 일본 경찰의 허가를 받는 등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윤응념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김마리아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인천으로 향했다. 윤응념과 김마리아, 독립운동가 도인권(1880~1969)의 아내가 탄 오토바이는 돌연 경찰관 주재소 앞에서 타이어에 구멍이 나버린다. 몹시 겁에 질린 이들은 숨을 죽이고 오토바이를 천천히 끌어 인근 수수밭 사이로 숨었다. 그들은 수수밭에서 밤이 깊어지길 기다렸고, 마침내 항구에 도착했다.7
항구에 도착한 이들은 곧바로 중국인 옷차림을 했다. 윤응념은 군청의 행정 업무를 맡은 관리인 척 연기한다. 목선을 타고 중국으로 가던 중, 해양경비대 검문을 당할 때마다 무척 놀란 김마리아가 정신을 잃어 경찰의 의심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윤응념은 유창한 중국어로 그가 뱃멀미가 너무 심해 그렇다며 능청스럽게 둘러댔고, 사흘 만에 중국에 도착했다.8
윤응념의 이러한 활약은 인천 중대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났으나 당시엔 명확한 증거가 없어 기소되지 않았다. 이후 김마리아는 자신을 감시하던 하촌 시즈미(河村靜水) 검사에게 ‘덕분에 여기에 도착했습니다’라는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
윤응념은 중국으로 탈출한 이후 행적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했다. 권총을 보여주며 독립운동 자금을 요청하긴 했으나, 이는 자신이 임시정부에 속한 독립운동가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러한 윤응념의 주장에도 일제 사법부는 그를 단순히 ‘강도’로 규정했다. 이러한 일제의 일방적 프레이밍을 비웃듯 윤응념은 김마리아와 10명의 독립운동가, 자신의 탈출극까지 성공해 내며 일제의 감시망을 유유히 따돌린다. 거침없이 인천 앞바다를 누비고 일제의 사법 체계를 뒤흔든 윤응념의 활약상에는 억압에 온몸으로 맞선 조선인들의 투쟁 정신이 담겨 있다.
[출처]
1) ‘조선일보’, 1923년 5월20일자 기사 2) ‘윤응념 판결문’, 국가기록원, 1923년 9월25일 3) ‘조선일보’, 1923년 9월19일자 기사 4) ‘동아일보’, 1923년 9월19일자 기사 5) ‘매일신보’ 1925년 5월24일자 기사 6) ‘조선일보’, 1927년 1월25일자 기사 7) ‘조선일보’, 1957년6월13일자 기사 8) ‘조선 소요 사건에 관련하여 도주 중인 김마리아 심문 건’,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932년 9월12일
/정선아기자 sun@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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