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밀려나고 국힘, 강성그룹이 지도부 구성

정부·여당, 3개월 만에 14개 법안 강행처리

권력·지지층 지키기 위한 무모한 질주일뿐

국민이 정치에 바라는 것은 책임의 레이스

정의종 서울취재본부장
정의종 서울취재본부장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내린 판결은 두 단어로 요약된다. 바로 ‘관용’과 ‘절제’다. 재판부는 위기 대응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수단의 정당성을 부정했고 대통령에게는 권력행사의 관용을, 절대다수 의석을 가진 더불어민주당에는 절제를 주문했다. 그러나 판결 이후 한국 정치는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달리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탄핵과 대선 패배로 정치무대에서 밀려났고, 여당이었던 국민의힘은 전열조차 가다듬지 못한 채 무기력한 야당의 신세가 됐다. 반면 민주당은 정권을 잡은 순간 전광석화처럼 국정을 장악했다. 불과 3개월 만에 인사·예산·입법을 휩쓸듯 처리했다. 내년도 예산은 728조원, 역대 최대 규모로 증액됐고 윤석열 정부 시절 대통령 거부권에 막혔던 21건의 법안 중 상당수를 단숨에 밀어붙였다. ‘관용과 절제’는 실종된 채 ‘속도전’만 남았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방송법 개정안이다. 정청래 대표 체제의 1호 개혁 입법으로 처리된 이 법안은 KBS 이사 구조를 바꾸고 시민이 사장 후보를 직접 추천할 수 있도록 했다. 시행 3개월 내 새 이사회와 사장을 선출토록 규정해 현직 사장은 사실상 자동 해임된다. YTN, 연합뉴스 등 다른 공영언론사도 줄줄이 수장 교체가 불가피하다. 여당은 “공영방송 정상화”라 주장하지만, 보수 진영은 이를 “정권의 언론장악”이라 규정하며 맞서고 있다.

입법 드라이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검사징계법, 순직해병 특검법, 비상계엄 특검법, 김건희 여사 특검법까지 줄줄이 강행 처리됐다. 지역사랑상품권법, 상법 개정안, 불법파업 관련 법안 등 야당 협력이 필요한 경제 법안도 예외가 아니었다. 윤석열 정부가 3년간 행사한 거부권이 21건이라면 이재명 정부는 취임 3개월만에 14건의 강행처리라는 ‘기형적 의회 구조’를 만들어냈다.

정치지형은 강대 강으로 재편됐다. 민주당은 열성 지지층의 요구에 맞춰 속도를 높이고, 국민의힘은 강성 지지그룹의 목소리에 기대 지도부를 구성했다. 관용과 절제는 실종되고 남은 것은 힘의 대결뿐이다.

며칠 전 개막한 정기국회는 이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여당은 형형색색 한복을 입고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었고, 야당은 검은 상복 차림으로 항의했다. 한쪽은 축제, 다른 한쪽은 장례식. 민의의 전당이라 불리는 국회는 다름을 포용하기는커녕 적대와 전투의 장으로 변해버렸다.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민주당은 헌법상 권력분립과 의회주의를 지키고 있는가. 헌재가 강조한 ‘절제’라는 정치적·헌법적 요청을 따르고 있는가. 그 독주는 법적 위반은 아닐지 몰라도 헌재가 주문한 ‘관용과 절제’라는 민주주의적 가치에는 반하는 듯하다. 힘을 쥔 쪽은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힘을 잃은 쪽은 방향조차 잡지 못한 채 무기력에 빠진 오늘의 정치. 누구를 탓하랴만, 국민이 목격하는 것은 제어장치가 고장 난 차량의 질주 같다. 최근 개봉한 영화 ‘F1 더 무비’ 속 레이스처럼 정치도 순간적 질주만으로는 완주할 수 없다. 치밀한 전략, 정교한 코너링, 팀워크가 어우러져야 한다. 절제가 없는 가속은 사고로, 팀을 무시한 독주는 리타이어(퇴출)로 이어진다.

여야 모두 ‘국민을 위한 정치’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권력과 지지층을 지키기 위한 무모한 질주일 뿐이다.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일갈한 ‘관용과 절제’는 뒷전으로 밀리고 남은 것은 분노와 속도다. 이대로라면 정치의 결승선은 파국이고 방치가 길어지면 종국에는 ‘대통령’의 몫으로 돌아가는 게 뻔하다.

돌파구는 없는가. 이재명 대통령과 여야 대표가 오늘 회동을 갖는다. 정치가 ‘분노의 질주’에서 ‘책임의 레이스’로 전환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다. 민주주의라는 트랙에서 완주의 조건은 단 하나다. 속도의 과시가 아니라 관용과 절제의 균형, 그리고 국민이라는 팀을 향한 책임이다. 국민이 지금 정치에 바라는 표지판은 분노가 아닌 책임의 레이스다.

/정의종 서울취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