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15일 새벽, 작전명 ‘크로마이트’. “만조 2시간 안에 인천 월미도 북쪽 해안에 상륙하라.” 성공 확률 5천분의 1 무모한 도전이었다.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온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전세를 뒤흔들 반전이 필요했다.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후방에 방심했던 북한의 빈틈을 공략했다. 조수간만의 차 10m, 좁은 수로, 가을 태풍 등 극악한 조건 속에 뱃머리를 인천으로 돌렸다.

켈로부대(KLO·대북첩보부대)의 희생이 없었다면 작전은 불가능했다. 최규봉 부대장을 포함한 특공대 6명은 하루 전인 9월 14일 팔미도에 침투했다. 섬을 점령한 북한군과 사투 끝에 잠입 4시간 만에 등대를 밝혔다. 함정 261척과 병력 7만5천여명은 깊은 밤 불빛의 인도에 따라 월미도 녹색해안에 진입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상륙 당일 인천을 탈환한데 이어 28일 서울수복에 성공했다.

인천상륙작전 75주년 기념주간 행사가 내일(18일)까지 열린다. 상륙작전 재연과 거리 퍼레이드, 전사자 추모·헌화, 뮤지컬 공연, 호국 음악회 등이 이어졌다. 최초 상륙지점인 월미공원에는 높이 4.7m 기념 조형물 ‘파도 위의 약속’도 세워졌다. 맥아더 장군의 아들 아서 맥아더 4세는 “한반도의 평화가 곧 세계의 평화”라는 친서를 보내 의미를 더했다.

유정복 시장이 그려온 75주년 청사진은 거창했다. 지난 2022년 프랑스 노르망디를 직접 방문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 하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을 축제 소재로 활용하냐” “평화도시를 위한 시민들의 노력은 물거품”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올해 유 시장의 ‘국제행사 격상’ 구상은 작전상 후퇴하는 모양새다. 참전국 정상 초청이 최종 무산됐다. 국가기념일 지정도 국방부와 보훈부의 부정적 의견으로 불발됐다. 6·25전쟁 3대 전투(인천상륙작전·낙동강전투·춘천대첩) 중에서 인천상륙작전만 국가기념일로 기리는 것은 형평성 문제에 부딪혔다.

“오늘의 연대가 내일의 평화를 연다.” ‘2025 국제평화안보포럼’이 전한 메시지다. 지난 15일 송도에 주요 참전국 참석자들이 모였다. 각국의 평화 메시지를 전하고 선언문에 서명했다. 세계가 직면한 도전과 과제를 이야기한 것은 의미 있다. 인천상륙작전이 전승 이미지로 소비되는 한계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일 테다. 기록된 영웅담부터 무명의 희생까지 모두 기억하는 평화도시 인천을 기대한다.

/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