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 유교 아닌 불교 더 깊은 유래

석가는 절대적·불변 참된 진리로

좌·우로는 편견없는 처방 못 얻어

새 체제 향해 자기혁신 계속하는것

‘중도’ 않고는 나라상황 직시 한계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중도’에 관하여 대개는 ‘좌’와 ‘우’의 어느 절충·타협 지점에 서는 것이라 생각하곤 한다. ‘중도좌파’다, ‘중도우파’다, 하는 말들은 그런 발상법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중도’의 쓰임새는 그것대로 유효한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보다 깊이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러한 용법을 새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 ‘중도’에 관해서는 유교 경전 말고 불교에 더 깊은 유래가 있다. 이 ‘중도’란 석가족의 성인 석가모니, 붓다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 고타마 싯다르타가 왕가를 떠나 고행하며 금강석같이 귀한 깨달음을 구할 때다. 당시 인도에는 세상에 실체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자아’라는 고정불변 영원불멸한 것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논의가 분분했다.

이때 석가모니는 이 ‘있다’ ‘없다’ 하는 유무의 상충·모순된 논리들이 모두 ‘진리’에 값하지 못함을 갈파하고 이 헛된 ‘양변’, ‘이변’의 관념을 타파·해체해 버린 새로운 차원의 존재론·인식론을 구하고자 했다. 그러니까 석가의 ‘중도’는 말은 ‘가운데 중(中)’ 자를 쓰는 ‘중도’이고 그래서 영어로도 ‘미들 웨이(the middle way)’라 번역되지만 이 ‘중(中)’은 유무의 논리 차원을 뛰어넘은 ‘중’이요, 유무의 논리의 허구성, 가상성을 뛰어넘어 ‘진여(眞如)’의 세계, 곧 우주 만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참된 진리를 그것 그대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차원에 서는 ‘중도’인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좌우’라는 말에 염증을 느껴왔다. 특히 자신을 지극히 정당한 ‘정좌(正左)’로 자부하는 이들, 그러한 자신의 위치로부터 원근법적인 논리를 구사하며 ‘자기편’ 아닌 이들을 향해 ‘중도우파’니 ‘극우’니 하는 ‘거리재기’식 ‘레떼르’를 붙이고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 이들의 허망함을 한탄해 왔다.

이런 식의 ‘좌’니 ‘우’니 하는 입장과 시각으로는 이 세계의 실상, 곧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으며 이들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어떤 편견 없는 처방도 얻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제 내가 새로 접한 ‘변혁적 중도주의’는 이러한 논리의 새로운 판본이다. 이 말은 ‘중도’라는 말에 ‘주의’라는 말을 붙여 중도로만 간다는 뜻을 강조했고 여기에 다시 ‘변혁적’이라는 말을 붙여 ‘중도’를 계속해서 혁신한다는 뜻을 덧보탰다. 전체적으로 ‘좌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체제를 향해 자기혁신을 계속해 가는 ‘중도’라는 뜻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개념을 표제로 삼은 책 속으로 들어가 보니 정작 그런 뜻의 중도는 온 데 간 데 없어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이 나라에서는 계엄령이 내란이다, 아니다, 진짜 내란이 지금 진행 중이다 하는 말들이 오가고들 있다.

나는 이 상황에서 상당수의 문학인들과 다른 입장을 갖는데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논란이 지속되는 이 나라가 사실은 1987년 6월의 국민주권혁명을 거친 상태라는 것이다. 이 한반도에는 그렇지 못한 사회가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 ‘나라’에서 국민주권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한국인’ 전체의 통합과 새로운 삶의 전망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변혁적 중도주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국민들이 주권을 박탈당한 한반도 북쪽의 체제 변화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 없는, 그러면서 계속해서 이 남쪽 사회의 변혁을 거듭해야 분단체제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난감하다’. 그러한 ‘전체주의’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는 포즈에 다름 아니다.

‘중도’에 서는 일은 정녕 쉽지 않은가 한다. 그러나 이 어려운 ‘중도’에 다시 서지 않고는 지금 이 나라가 처한 상황을 투명하게 밝혀볼 수 없을 것 같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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