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옷마저 짓밟은 일제… 순백의 얼은 더 타올랐다
국권 침탈후 흰옷을 결별해야 할 낡은 문화로 규정
색복 장려 운동은 단순 선전을 넘어 통제로 이어져
공공기관·학교·시장 출입 못하게 하거나 대출제한
먹물 뿌리거나 도장 찍어 아예 입지 못하게 하기도
저항심리 작용… ‘백의민족’ 정체성 만드는 불씨로
가로 143㎝, 세로 69㎝. 검은 바탕에 커다란 흰 글자가 적혀있다.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색복(色服·색 있는 옷)이라고 새겨져 있다. 깃발에 내걸었던 천으로 보인다. 천 왼쪽은 다소 뜯겨져 있지만, 오른쪽 위 아래 끈을 걸 수 있도록 구멍을 뚫은 천이 덧대어져 있다.
이 천은 지난 2014년 10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고양시 소재 국립여성사전시관이 소유하고 있는 이 ‘색복 장려 깃발’은 대일항쟁기 당시 ‘색복 장려 운동’이 실시됐음을 보여주는,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실물 자료다. ‘흰 옷을 입지 말고 색의를 착용하라’는 점을 독려하기 위해 의복 판매상에 매달게 했던 깃발로 추정된다. 유일하다는 점과 더불어, 그 당시 복식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사료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재에 등재됐다.
■ 백의민족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흰 옷을 즐겨 입었다. 비단 조선시대의 일만은 아니다. 그 먼 옛날 진수의 ‘삼국지’ 기록 등에서도 부여 사람들이 흰 의복을 선호했다는 이야기가 등장하고 삼국시대 벽화에서도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유는 구체적으로 추측하기 어렵지만 빛, 태양을 숭상하고 그와 유사한 흰 빛을 신성시한 것에서 비롯된 오랜 습성이라는 설에 무게가 실린다. 신생아에 흰 배냇저고리를 입히고 사자(死者)에 자연 그대로의 흰 수의를 입히는 등 생과 사 시작과 끝 지점까지 흰 옷과 함께하는, 민족 고유의 문화 그 자체로 자리 잡았다. 대대손손 내려오는 취향과 습성, 문화는 임금이라도 바꿀 수 없었다. 이미 고려, 조선시대 여러 왕들이 사상, 체제 전환, 생활상 편의 등을 이유로 흰 옷 대신 푸른색 등 다른 색 옷을 권장하거나 아예 금지령까지 내릴 정도였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공고해진 문화는 일제의 침략과 맞물려 체제에 대한 거센 저항을 불러오기도 했다.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의복 제도 개정안이 추진됐는데 이는 검은색 옷을 장려하는 을미변복령으로 보다 구체화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발령마저 선포되자 사회 전반의 혼란이 거세졌다. 유구한 전통, 민족 문화를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개화 추진에 대한 불만, 대대적인 항일 감정으로 이어져 당시 유생들이 의병으로 봉기하는 도화선이 됐다는 분석이다. 이들의 의병 운동은 초기 항일 운동의 주축을 이뤘다.
■ 대대적 규제에도 끝내 지우지 못한 흰 빛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이후,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지우려는 일제의 움직임은 갈수록 공고해졌다. 의복문화도 그 중 하나였다. 이는 생활 문화를 비롯해, 전반적인 근대화 추진 움직임과도 맞물렸다. 일부 지식인들 역시 흰 옷을 유지하기 위해 들어가는 노동력이 비생산적이라는 이유 등으로 색 있는 옷을 입을 것을 장려하기도 했다. 흰 옷에 대한 선호를 결별해야 할, 낡은 문화로 규정하는 시도가 꾸준히 이어져왔다. 급기야 춘원 이광수는 ‘동광’에 발표한 ‘색의(色衣)노래’를 통해 색복 착용을 장려하는 것을 넘어 흰 옷을 ‘망국의 옷’으로 지칭했다. ‘흰 옷을 벗어 놓고 / 일터로 가세 / 흰 옷은 망국의 옷 / 노는 이의 옷맘일랑 희게 희게 / 옷은 물들여 조선의 사람들아 / 일터로 가세’ (이광수, 색의 노래)
이 같은 분위기가 오히려 ‘백의민족’이라는 정체성을 만드는 불씨가 되기도 했다. 이전엔 없던 ‘백의민족’이라는 단어 자체는 색복 장려가 한창이던 1920년대, 이에 대한 반감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흰 옷과 우리 민족을 동일시 하는 경향도 짙어졌다. 시인 윤동주는 시 ‘슬픈 족속’을 통해 흰 옷을 입은 여인의 모습으로 대일항쟁기 억압받는 우리 민족을 형상화했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 흰 고무신이 거츤 발에 걸리우다 /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윤동주, 슬픈 족속)
시간이 지날수록 색복 장려 운동은 단순한 선전을 넘어섰다. 일제 주도의 문화 말살 정책과 맞물려 보다 강력한 통제로 이어졌다. 관공서를 중심으로 색복 착용을 의무화한 것은 물론, 지역마다 실적을 매기기도 했다. 제재가 심해지다보니 흰 옷을 착용할 경우 읍·면 사무소 등 공공기관, 학교, 급기야 시장 등의 출입을 제한하거나 금융기관 대출을 거절하기도 했다. ‘백의사절’이 적힌 간판, ‘색복’ 글자가 새겨진 깃발이 곳곳에 내걸렸다. 급기야 흰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예고 없이 먹물을 뿌리거나 도장을 찍었다. 흰 옷을 아예 입지 못하도록 망가뜨린 것이다.
전국을 막론하고 벌어진 이 같은 행태에 사회 혼란은 극심해졌고, ‘먹물 봉변’에 물리적 충돌마저 빚어졌다. 민초들의 반발도 컸다. 당시 색복 장려의 일환으로 각 지방 행정기관은 공동 염색소를 설치하는 한편 예산을 들여 흰 옷의 무료 염색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옷을 물 들이지 않은 채 먹물이 뿌려진 흰 옷을 그대로 입고 다니는 이들마저 있었다고 한다. 언어와 이름을 뺏는 것을 넘어 원하는 옷을 입을 자유마저 억압하는 분위기에 저항하는 심리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대적인 색복 장려 운동, 그리고 인권 탄압이라고 할 만큼의 강한 제재에도 일제는 이 땅에서 흰 옷을 지워내지 못했다. 색복 장려 운동에 반해 흰 옷을 입자는 촉진 운동이 특징적으로 전개됐던 게 아니었음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른 색 옷과 섞어 입는 등의 형태로 흰 옷을 계속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심에는 이른바 ‘슬픈 족속’들의 강력한 항일 의지가 있었다. 지난 2014년 국립여성사전시관은 소장하고 있는 ‘색복 장려 깃발’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을 당시 이를 알리며 “우리의 암울한 시기의 복식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닌 중요한 유물”이라고 설명했다. 어둡고 슬픈 그 시절 역사가 담긴, 그렇기 때문에 더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우리의 유산이다.
※ 참고 논문: 조희진 ‘식민지 시대 색복화 정책의 전개 양상과 추이’ (2007)
/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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