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볕 물별 반짝거리는 남해바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던 그간 사랑들

건너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

물길 거슬러 여수 떠나고 싶지 않아

서울에 밀린 일 따위… 아무렴 어때

김서령 소설가
김서령 소설가

고작 스무 살에 첫사랑을 했는데, 그 애와 나는 멀리 살아서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번쯤 만났다. 만나거나 헤어지는 건 언제나 기차역에서였다. 플랫폼에 서서 기차가 들어오기를 고개 빼꼼히 내밀고 쳐다보거나, 행여 제때 내리지 못할까 봐 이르게 기차 연결 칸에 서서 종종걸음을 쳤다. 만나서 무얼 했는지는 이제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만나자마자 헤어질 생각에 벌써 슬펐을 테고, 내 첫사랑은 그래서 늘 징징대는 연애였을 거다. 막차 시간이 되면 내가 떠나는 쪽이든, 배웅하는 쪽이든 안 가겠다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그땐 그렇게 배짱이 좋질 못했다. 더 어른이 되면 외박 따위 누구에게도 허락받지 않고 마음껏 할 거라 생각했다.

운 나쁜 나는 두 번째 연애조차도 롱디였다. 고시생이기까지 했다. 무릇 세상 모든 고시생이란 돈이 없는 법이어서, 오가는 일은 온통 내 차지였다. 스무 살 때보단 조금 더 어른이라 “안 갈래” 소리를 이번엔 할 법도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가난한 고시생과 그 여자친구가 안 가봐야 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참 나이를 먹도록 “안 갈래” 소리를 별로 못 해본 사람으로 자라버렸다. 싱거운 일이었다.

거문도였다. 여수에서 기차를 내려 배를 탔다. 두 시간이 걸려 도착한 그 섬은 생각보다 작았다. 동해 바다만 보고 자란 나에게 남해 바다는 퍽 시시했다. 갯바위에 모질게 부딪히는 파도도 없었고, 그 탓에 흰 거품이 발끝에서 부서지지도 않았다. 온종일 바닷가를 거닐면 어깨며 등에 소금꽃이 허옇게 필 만도 한데, 희한하게 남해 바다는 그저 조용했다.

나는 며칠 동안 부둣가를 뛰어다니며 갈치와 고등어와 홍합만 먹었다. 슈퍼마켓 사장님과 갈칫집 사장님과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주고받으면서 말이다. 거문도에 사는 소설가 선생님을 뵈러 간 길이어서, 동네 분들은 소설가 선생님 후배라며 아무거나 막 챙겨주었다. 심지어 배까지 공짜로 태워주었다. 어찌나 고요하고 다정하던지 이대로 거문도에서 시름시름 늙어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돌아가는 배를 타던 날, 나는 가방을 끌고 선착장에 나와 있었다. 아침 일찍 여수로 떠나는 배는 줄이 길었다. 천천히 타지, 뭐. 나는 내내 시시했던 남해 바다를 쳐다보았다. 가을이었는데 햇빛이 부셨고, 어깨가 따끈했다. 그래 봐야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을 텐데, 일행들이 이제 타야 한다며 내 등을 칠 때까지 나는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염없이, 라는 부사를 나를 설명할 때 써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듯하다.

다른 생각 없이, 나는 그저 바다만, 오래오래 쳐다보고 있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던 첫사랑과 두 번째 사랑과 그리고 나머지 사랑들이 마치 바다 건너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나는 그 물길을 거슬러 여수로 떠나는 배를 타고 싶지 않았다. 그 생각은 꽤 빠르게 나를 덮쳤고, 나는 내 행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만큼 몽롱한 상태가 되어 일행들에게 무작정 말하고 말았다. “안 갈래.” 벙찐 얼굴로 일행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다시 한번 내가 말했다. 이번엔 힘주어서. “안 간다고. 나 안 갈래.”

나는 그날 정말 가지 않았다. 소설가 선생님 등 뒤에 서서 말했다. “저 안 가도 되죠?” 선생님이 풉 웃었다. “그래, 가지 마라.” 나는 당장 배표를 부둣가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우리 뭐 먹을까요, 선생님?” 그러고서 뭘 먹었는지는 이제 와 기억나지 않는다. 왜 안 갔냐는 선생님의 늦은 질문에는 “물별 때문에요. 물별이 아주 돌아버리게 예뻐서요.” 그랬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시시한 남해 바다엔 대신 물별이 가득했다. 가을볕 받은 물별이 정신이 빠지도록 반짝거려서, 아무래도 하루쯤은 더 보아야 했던 거다. 서울에 밀린 일 따위, 아무렴 어때. “안 갈래”라는 말을 이렇게나 잘하는 어른이 되었는데. 나는 그렇게 그 섬에 하루 더 묵었다.

/김서령 소설가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