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속 불 밝힌 ‘천개의 등잔’
소나기속 장엄사 명상낙화축제
스님 범패 공연 이어 폭죽 불꽃
“어떤 일에도 개최” 태조의 유훈
도성내 불 났지만 행사 모두 강행
강도(江都) 시기 불꽃놀이가 8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과연 재현될 수 있을까. 고려시대 불꽃놀이는 연등(燃燈) 행사였는데, 왕이 참석할 정도로 국가적 대사였다.
지난 주말 강화도에서는 고려시대 연등행사의 전통을 살리고자 하는 불꽃축제가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2025 강화 장엄사 명상낙화축제’가 지난 20일 오후 6시부터 열렸다. 강화도 사찰에서 옛 불꽃놀이를 재현한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이 찾아 행사장을 빙 둘러섰다. 시골 동네에 차를 댈 곳이 없을 지경이었다. 불꽃놀이를 구경하고자 하는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여러 불교계 인사들이 함께했다. 박용철 강화군수와 한승희 강화군의회 의장, 윤재상 인천시의원, 박흥열·최중찬 강화군의원 등 정치권에서도 여럿이 찾았다.
소나기가 스쳐가는 가운데서도 행사는 계속됐다. 스님들의 범패 공연에 이어 불꽃에 불을 붙이니 폭죽 타들어가듯 작은 불꽃을 튀기며 화려하게 타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올해 장엄사 낙화축제는 작년에 이어 두 번째였다.
800년 전 강도 시기의 불꽃놀이는 어땠을까. 고려가 강화로 도읍을 옮기고 나서 이태 뒤에 그 기록이 보인다. ‘고려사절요’ 1234년 2월에 ‘연등하러 왕이 봉은사로 갔다’는 내용이다. 당시 고려 정권은 강화에 있던 관료의 집을 봉은사로 삼았는데, 왕이 행차하기 위한 길을 넓히려 민가를 헐기도 했다. 이때의 연등행사도 옛것, 즉 송도(松都) 시대의 것을 따라서 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봉은사 연등행사의 구체적인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지만, 이규보의 글을 통해 대략이나마 유추해 볼 수 있다.
이규보는 ‘봉은사 연등도량문’이라는 글을 남겼는데, 여기에서 ‘천 개의 아름다운 촛불 등잔은 찬란한 광명의 바다를 이루었고, 백 가지 맛의 진귀한 음식은 풍성한 공양의 구름을 일으킨 듯하나이다’라고 표현했다. 이규보가 과장이 심한 문장가이기는 하나, 사실관계는 명확히 했다는 점에 비춰보면 수많은 촛불 등잔에 불을 밝히고,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잔치를 벌였음을 알 수 있다.
봉은사 연등행사보다 10여 년 뒤인 1245년 4월 초파일에는 정권 최고 실세인 최이가 연등행사를 열었다. ‘최이가 8일에 연등하면서 채붕(綵棚)을 만들고 기악백희(伎樂白戱)를 베풀어 밤새도록 즐기니, 성중(城中)의 구경하는 사녀(士女)들이 담쌓은 것 같았다’고 ‘고려사절요’는 적었다.
채붕은 나무로 단을 쌓고 오색 비단 장막으로 장식한 무대라고 하는데, 이는 신라시대 팔관회(八關會)에도 있었다. 이렇게 장식해 놓고, 그야말로 노래와 춤의 최고수들만 뽑아 밤새도록 놀았다는 얘기다. 이를 강화성 안에 살던 남녀 백성들이 성처럼 빙 둘러 구경했다. 여기에서도 연등행사의 구체적인 모습은 밝혀놓지 않았다.
연등행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계속하라’는 고려 태조의 유훈이 있었기 때문인지 강도 시기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두 차례의 연등행사는 재난 상황으로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는데도 강행했다. 두 번 모두 연등행사를 코앞에 두고 강화 도성 안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었다. 1234년 봄에는 대궐 남쪽 동네 수천 호가 불에 탔으며, 1245년 3월에도 견자산 북쪽 마을 민가 800여 호가 불에 타서 80여 명이나 죽었다.
최근 연등행사는 전국 각지에서 즐기는 축제가 돼 있다. 세종시의 경우 불교 낙화법(落火法)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할 정도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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