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럼 마녀재판’ 실화 바탕, 아서 밀러 作

소녀들의 거짓 고발이 낳은 무수한 희생

1953년 초연 당시 미국 매카시즘 ‘광풍’

‘가짜뉴스’ 넘치는 오늘날 현실 반영 연출

인천시립극단 창단 35주년 기념 공연 ‘시련’의 한 장면.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
인천시립극단 창단 35주년 기념 공연 ‘시련’의 한 장면.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

1692년 영국 식민지 시절 미국 메사추세츠의 세일럼 지역에서 일어난 이른바 ‘세일럼 마녀재판’(Salem witch trials)은 영미권에서 집단 광기와 사법살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늘 첫 번째 사례로 꼽히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참극입니다.

이때 진행된 종교재판 혹은 마녀재판으로 무고한 마을 주민 19명이 사형을 당했고, 1명이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140여명이 억울하게 체포돼 옥고를 치렀습니다. 시작은 어린 아이들의 거짓 ‘마녀 고발’이었고,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면하기 위해 자신들의 선한 이웃을 마녀 혹은 악마로 고발했습니다.

인천시립극단이 지난 24일부터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 시작한 창단 35주년 기념 공연 ‘시련’은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1915~2005)가 세일럼 마녀재판 실화를 바탕으로 1952년 쓴 작품입니다.

세일럼 교회 목사 패리스의 딸 베티와 조카 에비게일을 비롯한 마을 소녀들이 숲속에 모여 춤을 추며 ‘금기된 장난’을 벌입니다. 패리스 목사가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되고,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소녀들의 ‘거짓말과 연극’이 시작됩니다. 마녀가 혼령을 불러내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거짓말, 그리고 거짓이 거짓을 낳는 연극이 한바탕 펼쳐지고, 그로 인해 대대적인 고발과 당국의 마녀재판이 시작됩니다.

‘진실이 된 마녀의 존재’가 무수한 희생자를 낳습니다. 고발의 주동자 에비게일이 하녀로 일했던 프락터 부부 또한 ‘거짓의 올가미’를 피하지 못합니다. 마녀재판이라는 광풍이 부는 세일럼 마을에서 하나둘씩 용기가 피어오르고, 사형을 선고받은 주인공 존 프락터는 거짓에 굴복해 살아남을지, 진실의 고귀함을 지킬지 고민에 빠집니다.

인천시립극단 창단 35주년 기념 공연 ‘시련’의 한 장면.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
인천시립극단 창단 35주년 기념 공연 ‘시련’의 한 장면.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

지난 24일 오후 첫 공연을 관람했습니다. 인천시립극단 ‘시련’의 무대는 투명 플라스틱 수직 띠가 여러 겹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은빛의 금속성 색깔을 띤 바퀴 달린 제단이 침대나 식탁, 재판정으로 활용됐습니다. 이번 공연의 드라마터그를 맡은 조만수 연극평론가는 시립극단의 무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태섭이 디자인한 이 장치를 이성열 연출이 활용하는 방식은 제단으로서가 아니라 거짓연극이 벌어지는 작은 무대다. 이 작은 무대는 도살장의 도축작업대이다. 세일럼의 아이들이 자신들의 거짓이 또 다른 거짓을 낳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이 작은 무대에서는 아이들의 거짓 연극이 펼쳐진다.”

연극 ‘시련’은 1953년 미국에서 초연됐습니다.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던 시기입니다. 아서 밀러도 공산주의자로 지목돼 반미활동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야 했으며,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갔습니다.

아서 밀러는 1950년대 초반 멀쩡한 사람까지 ‘빨갱이’로 몰아갔던 매카시즘과 1690년대 세일럼 마녀재판이 닮았다고 봤습니다. 이를 통해 인간 본성에 내재한 문제들에 대해 작품에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2025년 오늘, 세일럼 마녀재판은 무려 333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시립극단의 ‘시련’에서 본 마녀재판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습니다. 이번 공연을 본 모든 이들이 같은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진실처럼 퍼져가는 ‘가짜뉴스’, 진실이 통하지 않는 ‘확증편향적 주장들’, 이로 인한 각종 사회 갈등…. 현대판 마녀재판은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인천시립극단 창단 35주년 기념 공연 ‘시련’의 한 장면.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
인천시립극단 창단 35주년 기념 공연 ‘시련’의 한 장면.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

존 프락터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은 엘리자베스 프락터가 극 말미에 일갈하는 “고결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저들(자신을 마녀로 몰아간 이들)을 침몰시키”자는 대사가 뇌리를 때렸습니다.

이성열 인천시립극단 예술감독의 시립극단 마지막 연출작이기도 합니다. 이성열 예술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 이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기이하게도 72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무대에 오른다. 뭔가 이 작품에 대한 수요가 있으니 공연되는 걸 텐데, 그 이유가 뭘까? 나의 ‘시련’ 만들기는 바로 그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이 되고자 한다.

과연 우리 시대에도 마녀사냥, 마녀재판이 존재하는 걸까? 있다면 그건 뭘까? 나는 이 지점에서 가짜뉴스에 기반한 Fake Universe(가짜 세계)란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주인공 존 프락터가 각자의 욕심과 이해관계가 뒤엉켜 만들어낸 이 엉터리 가짜 세계를 깨부수고 자신의 고결함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이번 공연은 28일까지 이어집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