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국 심장서 일어선 조선학생 흔적, 망각과 싸우고 있는 비석 하나뿐

재일본한국YMCA 입구 앞에 1982년 세워진 ‘조선 독립선언 기념비’. 본래 2·8 독립선언이 있던 장소에 세워지진 못했으나, 재일 한인들의 자부심으로 통한다. 기념비 뒤편으로 지난 2월8일 있었던 독립선언 기념식 안내문이 붙어 있다. 재일본한국YMCA 측은 ‘잊지 않겠다’는 취지로 안내문을 떼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2025.9.11 도쿄/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재일본한국YMCA 입구 앞에 1982년 세워진 ‘조선 독립선언 기념비’. 본래 2·8 독립선언이 있던 장소에 세워지진 못했으나, 재일 한인들의 자부심으로 통한다. 기념비 뒤편으로 지난 2월8일 있었던 독립선언 기념식 안내문이 붙어 있다. 재일본한국YMCA 측은 ‘잊지 않겠다’는 취지로 안내문을 떼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2025.9.11 도쿄/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조선청년독립단은 … 세계 만국 앞에 독립을 이루기를 선언하노라”

“일본이 만일 우리 겨레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한다면 우리 겨레는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언하리라.”1

여전히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속에서 피가 끓게 만드는 문장들이다. 서울에서 민족대표 33인이 이른바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 한 달여 전인 1919년 2월8일, 일본의 심장부 도쿄 한복판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외친 ‘2·8 독립선언서’에 담긴 문장들이다.

도쿄에서 30여 년 만에 폭설이 쏟아진 날이었다. 이날 오후 2시 일본 도쿄 옛 간다구 니시오가와초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현 재일본한국YMCA) 회관 1층 강당으로 조선인 유학생들이 모였다. 연구에 따라 200~400명, 혹자는 600여 명까지 모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도쿄의 대다수 조선인 유학생들이 모였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도쿄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유학생들. 둘째 줄의 왼쪽부터 최팔용, 윤창석, 김철수, 백관수, 서춘, 김도연, 송계백 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재일본한국YMCA 제공
도쿄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유학생들. 둘째 줄의 왼쪽부터 최팔용, 윤창석, 김철수, 백관수, 서춘, 김도연, 송계백 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재일본한국YMCA 제공

이날 집회는 조선인 유학생 모임인 ‘학우회’ 예산 총회로 가장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집회를 주목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도쿄 경시청 이코마 과장과 니시간다경찰서 나카타니 서장을 비롯해 정복이나 사복을 입은 경찰들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2

“긴급동의!”

사회자 최팔용(1891~1922·와세다대 재학)이 ‘조선청년독립단’ 결성대회를 열겠다고 선언하자 현장에 있던 학생들이 하나같이 소리쳤다.

2·8 독립선언 실행위원 중 백관수(1889~1950·메이지대 재학)가 선언서를 읽어 내려간 후 김도연(1894~1967·게이오대 재학)이 결의문을 낭독했다. 이어 서춘(1894~1944·도쿄고상 재학)이 연설을 위해 강단에 올라서려 할 때 경찰은 학생들에게 해산을 요구했다. 이를 거부하는 학생들과 경찰 간 난투극이 벌어졌다. 실행위원 11명 중 9명을 비롯한 27명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2·8 독립선언은 일단락됐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의 결성대회에 앞서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와 독립선언문을 일본 제국의회 의원, 각국 대사관, 신문사, 지식인 등에게 우편으로 발송했다. 일본 당국은 관련 보도를 통제했지만, 2·8 독립선언 소식은 일본의 정치권과 지식인 사회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3월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한 만세시위가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같은 해 9월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여러 임시정부를 통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도쿄 2·8 독립선언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은 8·15 해방까지 항일투쟁과 독립운동 정신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1919년 2월8일 조선기독청년회관에 수백명

건물 에워싼 일제 경찰들 ‘선언’ 직후 연행

나흘후 100여명 히비야공원서 다시 “만세”

일본 사회 파장… 한달뒤 삼일운동 도화선

■ 흡연실 된 독립선언 추정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기 전 옛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모습. /재일본한국YMCA 제공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기 전 옛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모습. /재일본한국YMCA 제공

경인일보 광복·창간 80주년 특별기획 취재팀은 지난달 11일 오전 일본 도쿄 지요다구 재일본한국YMCA회관 2층에 있는 2·8 독립선언기념자료실에서 2·8 독립선언서(사본)를 마주했다. 독립선언서 원본은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 있다. 이곳 도쿄에는 사본을 전시하고 있지만, 106년 전 제국주의 일본의 중심에서 청년들이 선언한 민족의 자유와 독립 의지, ‘영원한 혈전’을 불사한다는 기개가 오늘날에도 그 현장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했다.

만방에 공표된 사실상 조선 첫 독립선언이 있기까지, 일본 경찰의 엄중한 감시망을 뚫은 도쿄 유학생들의 치밀한 준비와 국내외 독립운동 네트워크의 물밑 지원이 있었다.

옛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은 현 재일본한국YMCA회관에서 직선 거리로 600m가량 떨어진 지요다구 니시간다의 YS빌딩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옛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전소됐다. 이후 대대적인 도시 개조 사업으로 도쿄의 도시 지형이 크게 변화하면서 회관의 본래 위치를 특정하기 어려워졌다.

1914년 9월 건립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은 당시 유학생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콜로니얼 양식의 2층 목조 건물로, 건물 입구 현관은 한국 기와를 올려 민족 정서를 드러내도록 설계됐다. 회관 1층은 사무실, 응접실, 식당 등이 있었으며, 2층은 13~14명의 학생이 머물 수 있는 침실이 있었다. 도쿄에 오는 조선인 유학생 80%는 이곳에서 처음 일본어를 배우고 유학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강연회와 웅변대회 등도 활발히 개최됐다. 1층의 경우, 1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한다.3

유학생 거점 ‘청년회관’ 관동대지진때 전소

現 재일본한국YMCA회관 인근 위치 추정

찾아간 곳 1층 흡연실… 어떤 자취도 없어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있었던 옛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자리로 추정되는 도쿄 지요다구 니시간다 YS빌딩. 세탁소가 있던 건물 1층은 현재 공공휴게실(흡연실)로 바뀌어 있다. 2025.9.11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있었던 옛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자리로 추정되는 도쿄 지요다구 니시간다 YS빌딩. 세탁소가 있던 건물 1층은 현재 공공휴게실(흡연실)로 바뀌어 있다. 2025.9.11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이날 찾은 니시간다 YS빌딩 1층은 공공휴게실(흡연실)로 운영되고 있었다. 몇 해 전까지 오래된 세탁소가 있었다. 빌딩 숲과 넓은 교차로에 둘러싸여 금방 찾기가 쉽지 않았다. 취재팀과 동행한 재일본한국YMCA 주재형 총무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는 물론 재일 교민들에게 너무나도 큰 의미가 있는 장소”라며 “해당 건물에 2·8 독립선언을 기념할 수 있는 조그마한 공간이나 기념 표지라도 조성하고 싶지만, 사유지이기 때문에 쉽지 않다. 이렇게 잊힌 게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 감시망 뚫고 성사된 독립선언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은 언론이 통제되는 상황이었던 조선보다 더 빠르게 더 많은 양의 국제 정세에 대한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유학생들은 1918년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와 함께 민족대표의 파리강화회의 파견 추진 계획을 알게 되자 그해 말부터 은밀하면서도 발 빠르게 독립운동을 준비해왔다.

재일본한국YMCA 자료에 따르면 1910년대 일본 유학생은 1912년 사비·관비 포함 535명에서 1919년 678명, 1920년 1천141명으로 점점 늘었다. 유학생들은 학우회, 조선기독교청년회, 조선학회, 여자유학생친목회 등 단체를 조직해 뭉쳤다. 경찰은 일본 내 ‘요시찰 조선인’ 명부를 작성해 요주의 인물들을 감시해왔다. 대다수가 유학생이었다.

유학생들은 1918년 12월 말 망년회와 웅변대회를 잇따라 열었다. 일본 당국은 그 현장에 대해 “열렬하고도 진지하게 논의해 무언가 실행 운동을 하려는 기세를 보였다”고 보고하며 낌새를 맡았다.4

이듬해 1월6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또다시 웅변대회가 개최됐다. 이 자리에서 독립선언의 구체적 계획이 논의됐고, 실행위원 10명이 선출됐다. 유학생들은 이튿날에도 회의를 가졌고, 일본 경찰은 회의에 참석한 서춘, 윤창석(1894~1966·아오야마학원 재학)을 불러 주의를 줬다고 한다. 경찰의 감시망이 두터워지자 실행위원들은 음식점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논의를 이어갔다.

1월 중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진행한 회의에서 2·8 독립선언의 중심 인물 가운데 한 명인 최팔용이 “시기는 왔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송계백도 “아직 시기상조”라고 말했으며, 백관수는 이 둘의 의견에 동조했다고 한다. 윤창석과 서춘은 최팔용, 송계백, 백관수를 비판하면서 회의장에서 쫓아냈다.

이러한 상황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위장극’이었다. 그 사이 최팔용은 독립선언 준비를 총괄했고, 송계백(1896~1920·와세다대 재학)은 조선의 지도자들과 상의하고자 독립선언서를 숨겨 지닌 채 조선에 다녀왔다. 백관수는 조선기독교청년회에서 등사기를 빌려 선언서 등을 인쇄했다.5 그렇게 일본 당국의 눈을 속여 거사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 일본 심장부에서 잊힌 기억

YMCA회관에 자료실 만들어 ‘기억 보존’

정문앞 기념비… 1982년 이우환 화백 제작

2·8 독립선언서의 서명자들은 그날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대부분 경찰에 체포됐지만, 도쿄의 유학생들이 가슴속에 숨겨 왔던 독립에 대한 열망에 불씨를 당겼다. 나흘 후인 2월12일 유학생 100명이 도쿄 고쿄(일왕의 거처) 인근 히비야공원 음악당에 모여 다시금 만세를 불렀다. 만세시위 참가자 가운데 13명이 구속됐다. 이틀 후인 2월14일 총독부 기숙사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한 학생이 퇴사 처분을 받자 나머지 학생들이 항의하며 일제히 퇴사했으며, 같은 달 24일 또다시 학생 150여 명이 히비야공원 음악당에 모여 민족대회 소집 촉진부 취지서를 뿌리다가 16명이 체포됐다.

히비야 공원.
히비야 공원.

지난달 12일 오후 취재팀이 찾은 히비야공원 옛 음악당 터는 공원 보수 공사로 인해 출입이 불가능했다. 히비야공원 어디에도 2·8 독립선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현재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재일본한국YMCA회관의 2·8 독립선언기념자료실과 1982년 회관 정문 앞 한쪽 구석에 세워진 ‘조선 독립선언 기념비’ 정도다. 기념비는 한국의 대표적 현대미술가 이우환이 제작했는데, 이 같은 사실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

도쿄는 여전히 일본의 심장부다. 독립운동의 역사적 공간과 기억을 지켜나가는 일은 여전히 어렵기만 한 현실이다.

지난달 11일 오전 일본 도쿄 지요다구 니시간다램프 인근 교차로에서 취재팀과 동행한 주재형 재일본한국YMCA 총무와 종교사학자 홍이표 박사가 옛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위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소실된 옛 기독교청년회관 자리는 도쿄 도시 개조 사업으로 인해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2025.9.11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지난달 11일 오전 일본 도쿄 지요다구 니시간다램프 인근 교차로에서 취재팀과 동행한 주재형 재일본한국YMCA 총무와 종교사학자 홍이표 박사가 옛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위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소실된 옛 기독교청년회관 자리는 도쿄 도시 개조 사업으로 인해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2025.9.11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다음 편에서는 당시 체포된 유학생들의 본격적인 법정 투쟁과 조력자들, 오늘날 그 역사와 기억을 지키려는 노력들을 재조명해 점차 희미해져 가는 2·8 독립선언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 위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출처]

1) 2·8 독립선언서, 재일본한국YMCA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 전시본, 1919

2) 윤소영,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결행된 도쿄 2·8학생독립운동’, 월간 순국, 2025, 33쪽

3) 윤소영, ‘일본 도쿄 지역 2·8 독립운동 사적지 재검토’,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7집, 2019, 38~39쪽

4) 윤소영, ‘일제의 요시찰 감시망 속 재일한인유학생의 2·8 독립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97호, 2018, 63쪽

5) 윤소영, 위 논문 64~65쪽

도쿄/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