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무등탕

 

1984년 문 열어 40년 넘은 목욕탕

남탕 없어져도 여탕은 그대로 흥행

밥 차렸을 때 있으면 그날의 식구

만원 안 되는 돈으로 먹고 즐기고

72세 사장님 ‘목욕탕 언니’ 되는 곳

먹고사는 일이 먹고사는 공간으로

Prologue: 10년 전 여름, 기차 여행을 하던 대학생들의 인터뷰가 최근 SNS를 뜨겁게 달궜습니다. 10년 후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만나자는 10년 전 이들의 약속에 많은 사람이 낭만적 재회를 기대한 것이죠. 이들의 오래된 약속처럼 우리도 떠올리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또는 눈물이 나는 옛 추억 하나쯤 마음에 안고 삽니다.

레트로K 시즌3는 당신 마음에 새겨진 그리움을 찾아 떠납니다. 무언가 특별하거나 놀라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이야기일 지 모릅니다. 주말마다 엄마와 손잡고 갔던 동네 목욕탕, 목욕탕 평상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던 아주머니들, 학교 끝나면 출석 도장을 찍었던 동네 문방구, 그 옆 분식집에서 먹었던 달콤한 컵떡볶이. 어쩌면 사라졌을 수도 있고, 전혀 다른 공간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는 ‘그리운 그곳’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에 있는 수원 무등탕. 처음 방문했을 때 이슬비가 내려 목욕탕 입간판 뒤로 안개가 자욱했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에 있는 수원 무등탕. 처음 방문했을 때 이슬비가 내려 목욕탕 입간판 뒤로 안개가 자욱했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20여년 전, 주말 새벽이 되면 할머니 손에 끌려 ‘동네 목욕탕’에 갔습니다. 물이 깨끗할 때 가야 한다며 해가 뜨기 전부터 깨우는 통에 눈도 채 뜨지 못하고 투덜대며 목욕탕을 가곤 했습니다. 힘도 없는 할머니가 피부가 벗겨질 거 같이 때를 밀어주실 때 아프다고 떠나가라 소리치고 나면, 목욕탕 나무 평상에 앉아 비닐팩에 든 커피 우유와 구운 달걀을 먹는 게 그렇게 시원하고 달콤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평상에서 할머니의 목욕이 끝나길 기다렸죠.

그럴 때면 평상은 한바탕 소란스러워집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식당’으로 바뀌거든요. 수건으로 앞머리를 올리고 팬티만 입은 때밀이 아주머니가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고, 주인 아주머니는 밥솥에서 밥을 퍼가져옵니다. 그러면 목욕탕 안에서 수다를 떨던 아주머니들이 하나둘씩 집에서 싸온 먹거리를 들고나와 둘러앉습니다. 대단한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냥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까르르 손뼉치고 웃음이 쏟아집니다.

이제는 사라졌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 풍경이, 1984년 문을 열어 40년 넘게 수원의 한 골목길에 자리를 잡고 있는 ‘무등탕’에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매표소 작은 미닫이 창문과 그 옆에 붙은 요금표. 일반 8000원, 소아 5000원이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매표소 작은 미닫이 창문과 그 옆에 붙은 요금표. 일반 8000원, 소아 5000원이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검색창에도 나오지 않는 무등탕을 처음 간 날, 이슬비가 내렸습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는데 저 멀리 ‘목욕합니다’라는 입간판이 보였습니다. “아직도 이런 목욕탕이 있구나”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처음엔 분명 새하앴을 만한 나무 입간판은 이제 껍질과 함께 군데군데 벗겨졌고 ‘목욕’이라는 빨간 글씨 역시 바래져 있습니다. 입간판에서부터 “여기 오래된 곳이오” 말하는 듯 했습니다.

입간판이 세워진 골목길로 들어서니 ‘여성전용 무등탕’이 적힌 유리문이 나옵니다. 유리문을 지나 한 계단 반을 오르면, 매표소가 보입니다. 작은 미닫이 창문이 달려 있고 그 옆으로는 A4용지 반절 크기에 직접 손으로 적은 ‘요금표’가 붙어 있습니다. ‘일반 8000원, 소아 5000원’. 손님이 오면 사장님이 스르륵 작은 창문을 열어 인사하고 수건 2장을 건넵니다. 여탕은 자고로 수건 2장이 기본이죠.

올리브색 두툼한 커튼을 젖히면 증기가 목욕탕을 가득채울때 나는 ‘푸근한 물 냄새’가 반겨줍니다. “목욕탕에 왔구나” 실감나게 하는 그 냄새 맞습니다.

여탕에 들어가면 키만 대면 자동으로 열리는 신발장 대신, 7단 신발장에 신발들이 나란히 놓여져 있습니다. 올리브색 두툼한 커튼을 젖히면 증기가 목욕탕을 가득채울때 나는 ‘푸근한 물 냄새’가 반겨줍니다. “목욕탕에 왔구나” 실감나게 하는 그 냄새 맞습니다. 커다란 거울 양옆에 드라이기가 걸려 있고 거울 아래 나무 벽 선반 위에 빗과 면봉, 여성로션, 두루마리 휴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맞은편에는 수건이 걸린 옷걸이 두어 개, 옥색 바탕의 철제 옷 사물함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사물함 위에는 알록달록한 목욕바구니가 줄지어 놓여 있고 빛이 바랜 에어컨이 짱짱한 찬바람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20여년 전 할머니 손 잡고 오던 동네 목욕탕처럼, 냉장고에는 항아리 모양 바나나 우유와 비타민 음료가 채워졌고 맨 아래칸에는 반찬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냉장고 앞에는 나무 평상이, 그 옆에 밥솥이 있죠.

수원 무등탕 여탕 안에는 나무 평상과 냉장고, 밥솥이 놓여 있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수원 무등탕 여탕 안에는 나무 평상과 냉장고, 밥솥이 놓여 있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우리는 보통 한 집에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을 ‘식구’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기억처럼, 무등탕에 오면 여기 온 손님들에게 또 다른 집이 펼쳐지고 무등탕을 운영하는 이희자(72) 사장은 ‘목욕탕 언니’가 됩니다.

“나를 언니라고 해요. 여기서 (손님들이랑) 함께 밥먹고, 어떤 손님은 맛있게 먹었다고 5만원을 송금해. 그걸로 음료나 이런거 사서 나눠 먹으라고. 그만큼 맛있게 먹었다는 거지. 여기서 밥을 하기도 하고 손님들이 (음식을) 챙겨오기도 해요. 그냥 같이 밥 먹으면서 돈 다 필요 없으니까 먹고 쓰고 놀자 이런 얘기나 하는 거지 뭐”

함께 밥을 먹는 식구는 매번 달라집니다. 무등탕의 분위기가 좋아 10년을 일했다는 노정숙 세신사는 밥을 차렸을 때 목욕탕에 있으면 그날의 식구가 되는 거라고 말합니다.

“(음식을 차렸을 때) 있는 손님들이 먹는 거지. 따로 차려드릴 수는 없고. 먹을 때 오면 잡숫는 거고. 우리(세신사)들은 일해야 하니까 왔다 갔다 하면서 먹지”

메뉴도 매번 달라지는데 주로 제철 음식이 오릅니다. 감자를 좋아하는 언니가 푸짐하게 쪄서 내려오기도 하고, 겨울에는 달걀을 삶아 먹습니다. 밥만 먹고 땡이 아닙니다. 목욕하고 가는 손님들 손에 비닐봉지를 하나씩 건넵니다. 사장 부부가 직접 수확한 채소를 전해주는 거죠.

만 원도 안 되는 돈을 내고 목욕하러 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수다도 떨고 단골손님들이 말하는 무등탕의 매력입니다. 30년 단골인 이혜숙 어머님이 여전히 무등탕을 오는 것도 이 매력에 푹 빠졌기 때문입니다.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오는거야. 다른 곳 가면 어색해. 낯설기만 하고,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보던 사람이 좋더라고. 다른 목욕탕 가면 다른 집에 간 거 같아”

사실 언제 모일지 정하지 않습니다. 오다가다 만나면 그때마다 사랑방이 되고 그렇게 오랜 시간 얼굴보며 밥을 먹다보니 가족같은 관계가 되는 거죠. 이희자 사장은 특히 주부들에게 이런 시간들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맛있는 음식 먹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이 말이죠. 그래서 목욕탕 언니는 기본 30년은 다녀야 단골손님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어쩌면, 여탕만 살아남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무등탕 2층은 원래 남탕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익이 나지 않아 20여년 전 문을 닫았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사랑방의 모습을 간직해 무등탕의 여탕을 지킨 셈이죠.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에 있는 수원 무등탕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재래식 목욕탕이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에 있는 수원 무등탕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재래식 목욕탕이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지금도 와서 그렇게 얘기해요. 여기(무등탕) 30년 넘게 다녔다고. 자기 딸이 호주에 가 있는데 가끔 통화하면 ‘그 목욕탕 아직도 있다. 얼마나 좋은지 몰라. 집도 가깝고’ 그 손님 딸이 한 마흔 몇 살 됐을걸요. 아무튼 애기 때 같이 왔으니까 (그런 얘기를 하겠지) 여기 다 그 정도 다닌 손님들만 와요”

어쩌면, 여탕만 살아남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무등탕 2층은 원래 남탕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익이 나지 않아 20여년 전 문을 닫았죠. 40년 넘게 한자리를 지키는 여탕과 달리 말입니다. 목욕탕 언니와 단골손님, 세신사들이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사랑방의 모습을 간직해 무등탕의 여탕을 지킨 셈이죠.

무등탕은 김두만(77)·이희자 부부가 40여년 전 함께 문을 열었습니다. 휴식공간이 있는 찜질방, 한증막이 있는 요즘의 사우나와 달리, ‘기본’에 충실한 공중목욕탕입니다. 과거 수원 이목리에 있던 해태유업에서 ‘기관장’으로 일한 김두만 사장님은 보일러 기술을 살려 무등탕을 열었고 물을 데우는 것부터 김두만 사장님의 손을 안 탄 곳이 없습니다. 지금도 문제가 생기면 김 사장님이 직접 고칩니다. 김두만 사장님은 가진 것이 없어 기본만 두고 장사했다지만, 단골손님들은 그게 무등탕의 매력이라고 강조합니다. “재래식 시장처럼 재래식 목욕탕이라고 하죠. 옛날 그 모습 그대로라 이 동네 사람들이 여기만 오지 않나 싶어요”

지금이야 동네 공중목욕탕을 찾기 어려워졌지만, 과거에는 무등탕 주변에도 여러 공중목욕탕이 있었습니다. 특히 90년대 말에는 목욕탕이 ‘핫’했죠. 옛날에 했던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만 봐도 목욕탕 주인집을 부유한 집안으로 표현했습니다. 목욕비 600원으로 시작했던 무등탕도 옛날에는 남탕에 이발사를 둘 정도로 황금기가 있었습니다. 여탕에서는 큰 고무대야에 설거지를 해야 할 정도로 많은 손님이 오갔다고 합니다. “그때는 (손님들이) 돈을 잘 썼어요. 그때 많이 먹었지. 여성 손님들 중에서는 (여기서) 술 먹는 사람들도 많았어”

그러나 집집마다 샤워시설이 갖춰지고 2000년대 초반 대형 사우나, 대형 찜질방이 문을 열면서 동네 목욕탕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췄습니다. 무등탕도 위기를 겪었습니다. 사장님 부부도 고민이 많았지만, 큰 욕심내지 말고 지금까지 찾아준 손님들께 베풀며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목욕탕 문을 여는 시간이 새벽 3시로 당겨진 것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사람이 없을 때 목욕하고 싶다는 단골손님 요청에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에 있는 무등탕은 1984년 문을 열었다. 20여년 전만해도 여탕과 남탕을 모두 운영했지만, 지금은 여탕만 운영하고 있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에 있는 무등탕은 1984년 문을 열었다. 20여년 전만해도 여탕과 남탕을 모두 운영했지만, 지금은 여탕만 운영하고 있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처음 무등탕 문을 열 때 사장님 부부도 여느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시작했습니다. 그랬던 목욕탕이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이 되었고, 나눔의 공간이 되었으며, 이제는 없어져서는 안 될 추억을 간직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목욕탕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런 생각은 정말 해본 적이 없어요” 무등탕이 문 닫는 일을 절대 없을 거라는 단골손님의 말처럼, 사장님 부부는 오늘도 목욕탕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합니다.

“이 건물(목욕탕)이 낮고 보잘 것 없어도 여러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고 또 매일 이 일을 하니까 나태해지지 않아 건강하고, 고마운 손님들도 너무 많죠. 목욕하러 온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먹을 것도 챙기니까 고맙고 그래서 우리도 또 베푸는 거죠.”

‘동네 목욕탕’은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을 대신해 어린시절을 함께해주신 할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공간입니다. 레트로K 시즌3 ‘노스탤지어의 공간’ 첫 편으로 목욕탕을 선택한 이유기도 하죠. 제가 다녔던 동네 목욕탕은 이제 사라졌고 저와 언니, 할머니의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목욕탕 특유의 푸근한 물 냄새를 맡게 되거나, 비닐팩에 든 커피우유를 볼 때면 어린시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20여년 전 할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동네 목욕탕, 단골손님들의 무등탕처럼 당신의 추억이 담긴 공간을 알려주세요. 평범한 이야기여도, 이름만 적어도 괜찮습니다. 당신의 추억, 그리움이 담긴 공간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god@kyeongin.com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