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봤던 베스트셀러… 연휴, 골라 읽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란 말도 점점 희미해져 간다. SNS, 유튜브, OTT, 게임, 골프와 러닝 등 책을 대체할 취미 거리가 넘친다. ‘책을 읽자’란 구호도,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란 질문도 이젠 무색하다. 한편에선 ‘문해력 논란’과 ‘텍스트 힙’(Text Hip·세련돼 보이는 행위로서 책 읽기) 현상이 교차한다. 여전히 책 읽기의 중요성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유독 긴 추석 연휴, 올해 들어 목표한 만큼 책을 읽지 못했거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이들에게 여유 있는 독서 시간을 확보할 올해의 마지막 기회다. 무작정 책을 읽기보다는 주제를 정한 독서가 긴 연휴 동안 책 읽기의 동기를 부여하기 좋다. 경인일보는 명절을 맞아 ‘가족’을 주제로 읽을 만한 책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혼자서 하는 독서가 아닌 가족과 함께하는 책 읽기를 권한다. 모처럼 모여 앉은 가족과 함께 책을 매개로 소통해보면 어떨까. 명절 가족 모임이 한층 풍성해지지 않을까.
■ 김유담 단편 소설집 ‘돌보는 마음’ (민음사·2022)
‘집 안 여자’, ‘엄마다움’… 소설로 생각해보는 돌봄의 의미
김유담 단편 소설집 ‘돌보는 마음’(민음사·2022)은 돌봄 노동을 홀로 감내하는 각계각층의 여성에 주목한다. 타인의 ‘건강과 안녕’을 목적으로 하는 돌봄 노동을 결혼과 동시에 떠안게 된 이들은 그 목적만큼이나 광범위한 책임과 의무를 맞닥뜨린다.
한 번 시작된 돌봄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의무와 노동으로 이어진다. 특히 전 세계의 건강을 위협한 코로나19 팬데믹과 경제 위기는 돌봄 노동의 책임과 의무를 더욱 크고 무겁게 만들었다.
‘돌보는 마음’은 집, 병원, 직장 등 대도시와 지역의 일상적 공간에 위치하는 우리 사회 ‘돌봄 현장’ 곳곳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청소년과 노년, 전업주부와 감정 노동 종사자 등 각계각층의 시선으로 돌봄의 현실과 마음을 펼쳐 보인다.
스스로 ‘돌보는 사람, 그리고 쓰는 사람’이라 말하는 김유담 작가는 실제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표정과 말투, 은근한 뉘앙스가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 실생활의 면면과 광범위한 사회적 분위기를 세밀하게 보여준다.
소설집 1부는 여러 세대 여성들의 시선으로 ‘집 안 여자’를 둘러싼 돌봄 노동의 기울어진 역학 관계를 바라본 작품들이 수록됐다. 2부는 예전과 달라진 ‘엄마다움’에 주목하는데, 작가는 ‘엄마’가 시작되는 장소로 ‘산후조리원’을 들여다본다. 3부는 돌봄 노동의 부조리함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노인 돌봄의 현장으로 향한다.
■ 이동해 ‘단 한 사람의 한국 현대사’ (푸른역사·2024)
“할아버지·할머니는 어떤 삶을…” 역사가 되는 생애
‘단 한 사람의 한국 현대사’(푸른역사·2024)는 할머니·할아버지에게 “어떻게 살아오셨나요?”라고 한번쯤 물어본 적이 있는지, 혹은 그들의 삶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은 있는지 되돌아 보게 만드는 역사책이다.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는 저자 이동해의 외할아버지 허홍무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1935년 충남 아산 영인면 신운리에서 나고 자란 허홍무의 할아버지는 지주였다. 그래서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허홍무의 집안에서 벌인 광산 사업이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식구들과 함께 고향을 떠난 허홍무의 아버지는 인천 부평의 군수공장 ‘미쓰비시제강 인천제작소’에 취직하기도 했다.
그 시대 누구나 그랬듯 허홍무와 가족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저자는 외할아버지 구술을 기록하고, 그 기록의 역사적 맥락을 찾아 고증해 ‘하나의 역사’로 재구성했다. 일제강점기 농촌의 모습, 일본군 군수산업 클러스터였던 인천 부평에서 산 평범한 민초들의 생활상 등이 저자의 외할아버지 구술에서 생생하게 살아난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 이야기는 한 사람의 생애사를 넘어 굵직한 역사의 한 조각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 책은 일깨운다.
올 추석엔 오랜만에 만난 가족에게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천천히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 김금희 장편소설 ‘대온실 수리 보고서’ (창비·2024)
씨줄과 날줄 엮듯… 창경궁 대온실 역사서 ‘나’를 마주하다
창경궁 대온실에 얽힌 역사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 엮듯 엮어낸 김금희의 장편 소설 ‘대온실 수리 보고서’(창비·2024) 또한 가족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소설은 1909년 건립된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온실인 ‘창경궁 대온실’ 수리 공사를 진행하는 건축사사무소에서 보고서 작성을 맡게 된 30대 여성 영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영두는 대온실을 만들던 시기, 1945년 해방 전후, 한국전쟁 당시 역사 기록을 좇다 자신과 연관된 이야기와 마주하게 된다.
아버지와 단 둘이 살던 영두는 인천 강화군 석모도 출신이다. 어린 시절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가 큰 상처를 안고 다시 섬으로 돌아온다. 소설 속 석모도는 그리움의 공간이면서 ‘대온실’ 같은 치유의 공간이다.
김금희 작가는 창경궁과 연관된 다양한 인물들을 근대의 역사적 장면과 연결지어 생생하게 형상화했다. 작가가 치밀하게 고증한 실제 역사와 소설 속 대온실 보수공사 중 땅 밑에서 드러나는 비밀이 연결되는 순간이 흥미롭다.
영두는 어린 시절 서울에서 지낸 창경궁 인근 낙원하숙의 문자 할머니가 오래전 자신에게 “정신을 차갑게 깨우는 사랑”을 줬듯,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작성하며 오래도록 용서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비로소 껴안을 수 있게 된다.
영두는 부서진 삶을 수리하고 미완으로 남았던 소망을 재건한다.
■ 김달림 에세이 ‘나의 두 사람’ (어떤책·2018)
내 삶의 이유가 되어 준 당신들 이야기 ‘담담한 뭉클함’
1988년생 김달림 작가는 1939년생 김홍무 씨와 1940년생 송희섭 씨의 품에서 자랐다.
다리가 불편해 바깥 활동이 편치 않은 할머니와 건설 노동자로 공사 일정이 잡히면 몇 달씩 집을 비워야 하는 할아버지 사이에서 작가는 행복과 불행을 고루 느껴 본 어른으로 자랄 수 있었다.
김달림 작가의 ‘나의 두 사람’(어떤책·2018)은 작가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다. 조손 가정, 할머니·할아버지 손에서 자란 아이, 엄마 없는 아이 같은 말들로 단정지을 수 없는 삶의 무수한 결들이 작가의 문장에 실려 한 권의 책이 됐다.
“예민한 시기였고 할아버지가 일을 그만둔 뒤로 일정한 수입이 끊겨 집안 형편이 가장 어려울 때였다. 열여덟의 나는 급식비를 내지 못해 칠판에 이름이 적혔고 다음 수업 때까지 준비해 오라는 문제집을 살 돈이 부족해 가슴을 졸였다. 열아홉, 대입을 앞두고 학부모 상담에 온다던 아버지는 결국 오지 못했고 그날 나는 학교 화장실에 숨어 울었다.” (‘나의 두 사람’ 82쪽)
작가가 평범한 어른이 되기까지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평범하지 않은 노력이 필요했다. 50의 나이에서 다시 시작된 부모 노릇, 처음부터 되풀이돼야 할 고된 밥벌이 같은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일상을 담담하게 적었다.
그 담담함으로 이들의 이야기가 오히려 더 뭉클하게 다가온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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