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에 기업이 ‘폭삭’… 노동자들은 ‘속았다’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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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금 챙기고 고용승계 거부’ 한국옵티칼

‘흑자 정리해고’ HP프린팅코리아가 대표적

외국인투자기업들이 국내에 진출하면서 각종 지원과 세제 혜택을 받지만, 경영상 판단을 이유로 손쉽게 구조조정을 단행하거나 경영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사례(9월24일자 7면 보도 등)가 반복되고 있다. 이 문제는 올해 국정감사의 주제로 떠올랐다.

HP프린팅코리아, 또 해고 추진… 노조 “3년간 흑자·점유율 늘어”

HP프린팅코리아, 또 해고 추진… 노조 “3년간 흑자·점유율 늘어”

3년 전 법원이 강제 휴업 명령의 효력을 정지시키며 봉합됐던 성남 판교 소재 HP프린팅코리아(이하 HPPK) 사태(2022년 7월7일자 9면 보도)가 이번에는 정리해고 국면으로 재점화됐다. HPPK는 미국 기업 HP의 프린팅 사업 한국법인으로 지난 2017년 삼성전자에
https://www.kyeongin.com/article/1752227

화재보험금 수백억원만 챙긴 채 고용승계를 거부한 한국옵티칼과 흑자에도 정리해고를 추진하는 HP프린팅코리아(이하 HPPK)가 이 문제의 실제 사례인데, 최근 국회가 외투기업 규제 강화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킨 상황에서 제도 개선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9일 더불어민주당 김주영(김포시갑) 의원실에 따르면 한국옵티칼하이테크는 삼성화재로부터 화재보험금 총 647억원을 수령할 예정인 가운데, 현재 보험금 청구서류 제출 절차만 남은 것으로 파악됐다. 한편 사측은 화재 직후 곧바로 폐업을 통보했는데, 앞서 소방청 현장조사서에는 ‘보험 가입으로 피해 복구에 어려움이 없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이후 노동자들의 고용승계 요구는 외면한 채 물량은 자매사 평택 한국니토옵티칼로 이전하고 신규 채용을 이어갔다.

미국 HP의 한국 법인 성남 판교의 HPPK도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사측은 글로벌 시장 둔화를 이유로 지난 4월 권고사직을 제안한 데 이어 최근 90명을 대상으로 정리해고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그러나 노조에 따르면 HPPK는 최근 3년 연속 흑자를 기록했고, 주력인 A3 프린터 시장 점유율도 확대됐지만 고용 환경은 후퇴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재우 HPPK 노동조합 위원장은 “정리해고 통보 기한은 지난달 30일까지였는데 노조가 협상을 거부한 상황이라 아직 이뤄지지는 않았다”며 “사측의 조치는 정리해고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경영상 위기도 없고 해고 회피 노력도 부족한 데다 대상자까지 미리 정해놓고 추진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상황을 전했다.

외투기업은 국내 진출 시 자국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폭의 혜택을 받는다. 법인세와 소득세를 최대 7년 감면받고, 공장 부지 임대료 인하나 취득세·재산세 감면도 가능하다. 경기도의 경우 평택은 15년간 85%, 시흥은 10년간 85%의 재산세 절세를 누릴 수 있다. 이런 지원은 투자 유치와 고용 창출을 목적으로 제공되지만, 기업이 의무를 다하지 않을 경우 제재할 장치는 사실상 없다.

21대 국회에서는 더불어민주당 김정호 의원과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각각 ‘외투기업 먹튀 규제 패키지법’ 등을 대표 발의했으나 모두 폐기됐다. 해당 법안들은 폐업 시 산업부 장관 신고 의무와 정부 지원 환수, 고용 영향 심의 등을 담았는데, 투자 환경 위축 우려를 이유로 상임위 문턱조차 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이런 입법 공백 속에서 최근 국회는 한국옵티칼 조합원 박정혜씨의 600일 고공농성 해제를 계기로 ‘외국인투자기업 노동자 보호 제도 개선 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들이 참여해 외투기업의 무분별한 철수와 고용승계 회피를 막을 입법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목표다.

지난 8월 29일 경북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옥상 고공농성장에 크레인이 접근해 박정혜 수석부지회장을 데려오고 있다. 2025.8.29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지난 8월 29일 경북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옥상 고공농성장에 크레인이 접근해 박정혜 수석부지회장을 데려오고 있다. 2025.8.29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법인세 감면 등 자국기업보다 큰 혜택 불구

의무 다하지 않아도 사실상 제재 장치 없어

21대 국회도 투자위축 우려 규제법안 폐기

해고 노동자들의 고용승계 요구를 외면해온 ‘먹튀’ 외투기업에 맞서 고공농성을 펼친 박씨는 정부와 여당이 교섭을 위한 국회 청문회를 열고 외투기업 규제 입법(‘먹튀방지법’)을 추진하겠다고 하자 지난 8월 29일 농성을 해제했다.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등은 한국옵티칼하이테크(일본 닛토덴코 계열사)가 지난 2022년 대형 화재로 전소된 뒤 화재 보험금 등을 수령하고 폐업했지만, 해당 공장이 맡아온 LCD 편광판 생산 물량은 그대로 평택 한국니토옵티칼로 옮기고 구미 공장 노동자 고용 승계를 거부한 점을 문제 삼았다.

이와 별도로 현재 민주노총이 추진 중인 개정안에는 정부나 지자체가 외투기업에 지급한 지원금을 환수할 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범위에서 최대 2배까지 추가 징수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이 신설돼 있다. 환수·추가 징수는 국세 강제징수나 지방행정제재·부과금 징수 절차를 통해 집행할 수 있도록 명문화했다.

한국옵티칼 박정혜씨 고공농성 해제 계기

국회 ‘노동자 보호 제도 개선 특별위’ 출범

민주노총도 관련 법안 마련, 입법 요구 나서

김한주 금속노조 언론부장은 “민주노총 차원에서 외투기업 규제 관련 법안을 마련해뒀고, 이전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까지 종합해 입법을 요구할 계획”이라며 “핵심은 외투자본이 특혜와 이익만 챙긴 뒤 지역경제에 피해를 주는 무분별한 철수를 막는 것이다. 지자체가 제공한 혜택은 환수할 수 있도록 하고, 고용문제 등 지역경제에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규제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오는 15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용승계 문제와 관련해 이배원 니토옵티칼 대표이사가 증인으로 채택됐다. 앞서 박정혜씨가 지난 8월 고공농성을 해제하며 당·정·대가 “니토옵티칼을 국회로 불러내겠다”고 약속했던 만큼, 그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니토옵티칼 측이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김주영 의원은 “피해복구에 장시간 소요된다는 이유로 먼저 폐업을 신청했으나, 정작 피해복구가 가능한 수준의 화재보험금을 받고도 지난 3년간 피해복구 노력은 기울이지 않고 있다”며 “이윤만 챙기고 고용은 회피하는 전형적인 외투기업의 비윤리적인 행태에 대해 이번 국정감사에서 강력히 문제 제기하겠다”고 전했다.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