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편집본’ 유튜브 소비 익숙
속도 숭상 자본주의, 독서 영향
효율이 미덕·느림은 낭비 여겨
장면·문장 오래 볼 경험 필요해
추석의 긴 연휴를 좀 더 여유롭게 즐기기 위해 오랜만에 넷플릭스를 켜고 영화를 고른다. 현재 가장 인기가 있는 영화 TOP 10이 제일 먼저 보이고 내가 보았던 영화들을 고려해서 추천하는 영화목록들도 펼쳐진다. 새로 올라온 영화 드라마, 각종 영화제 수상작 등 인공지능은 다채로운 상차림으로 여러 콘텐츠를 추천한다. 하지만 쉽게 영화를 고를 수 없다. 대신 리모컨으로 영화들을 옮겨다니며 30초가량의 예고편 격인 짧은 영상을 계속 보는 것이다. 마치 뷔페에서 여러 음식들을 조금씩 맛보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 저 영화로 그리고 다시 다음 영화로 계속 옮겨다니기만 한다. 진득하게 한 영화를 보기에는 뭔가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고 불안하다. 두 시간을 할애해서 한 편의 영화를 보기에는 시간이 아깝다고 느끼는 것이다.
어쩌다 한 편을 선택해서 보다가도 재미가 없다고 느끼면 금방 다른 영화를 선택하기 위해 다시 영화 차림상 앞으로 나와버린다. 그러다보면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리고 금세 피곤해져서 영화 보기를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나름 여러 영화의 재미있는 장면들을 두루 맛보았기에 가벼운 포만감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세태를 반영해서인지 최근의 영화들은 시작부터 속도감 있는 편집과 빠른 전개로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시청자들이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재미를 쏟아내야만 채널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제작자도, 감독도, 시청자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패스트푸드가 그러하듯 지난날 우리가 영화에서 찾던 깊은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벌써 20년 전이라는 것에 깜짝 놀라기도 하지만 1990년대까지의 영화들을 보면 관객의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도입부부터 매우 느린 전개를 통해 관객의 몰입을 점진적으로 높이고 그걸 통해서 감동의 순간을 한층 더 강렬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순간을 위한 정서적 층위를 한겹 한겹 쌓아 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이렇게 영화를 만들려면 대체로 흥행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조금 다른 방식의 영화 소비 방식이 생겨났다. 영화 앞부분의 지루한 빌드업은 내레이션으로 빠르게 정리하고 재미있는 부분들만 편집해서 20분 정도의 짧은 분량으로 만든 유튜브 영상을 실제 영화 대신에 보는 것이다.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들이 짬을 내서 보기에 적절한 분량이기도 하고 재미있는 부분만 골라 먹기에도 좋지만 차근차근 쌓아올린 시간이 만드는 벅찬 감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관객들도 더이상 장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진지하게 감상하기보다는 즉각적인 자극을 소비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그리고 진지한 것은 지루한 것으로 재인식된다.
속도를 숭상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영향 아래에서 독서 문화라고 다를 바가 없다.
두꺼운 책은 독자들이 싫어한다는 이야기가 출판 관계자들과 작가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들린다. 열 권짜리 대하소설을 읽던 시대는 지나가고 단권짜리 장편소설을 더 선호하고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집이 더 읽기에 편하다고 한다. 시집도 마찬가지여서 오십 편, 육십 편씩 묶어내던 시집들이 점점 줄어들고 좀더 적은 편수로 독자들의 호흡에 맞춘 시집들이 늘어간다. 자본주의 사회의 효율성과 경제성의 원리가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독자들의 소비 취향이 다시 문화 창작자들의 작업방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면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속도를 숭상하는 사회에서는 효율이 미덕이 되고, 느림은 곧 낭비로 여겨진다. 그러나 너무 빠른 속도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경험의 두께를 점점 얄팍한 찰나의 감각으로 대체하게 만드는 것이다. 긴 이야기를 따라가던 집중력도, 문장을 곱씹던 사유의 시간도 빠르게 지나치게 된다.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아니 더 축약된 시간으로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느린 시간의 경험은 사치가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빠른 속도로 확보하는 더 많은 정보와 콘텐츠가 아니라, 한 장면과 한 문장을 오래 바라볼 수 있는 지루한 경험일지도 모른다.
/이원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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