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 행차한 신니동 가궐터 ‘행방 묘연’
정족진의 유적만 발굴 단정 못해
‘임시 대궐 건설’ 왕명 기록 남아
위치 찾기 ‘고려 통로’ 중요 과제
매년 10월이면 강화도 전등사 일대에서는 삼랑성역사문화축제가 펼쳐진다. 제25회 올해 행사는 지난 4일부터 12일까지 ‘시간’을 주제로 열렸다. 전등사를 품고 있는 삼랑성(三郞城)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곳이다. 정족산성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에서 병인양요 당시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격퇴시키기도 했다. 삼랑성 동문 입구에는 이를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삼랑성역사문화축제에서는 매번 ‘고려 왕 행차 재현 행사’도 열린다. 고려가 강화도에 도읍을 옮긴 뒤 왕궁에서 이곳 삼랑성까지 행차했다는 점을 되새기기 위함이다. 삼랑성에는 왕이 머물던 거처도 지었다. 이름하여 삼랑성 가궐(假闕)이다.
지난 11일 오후, 그 가궐터를 찾아 전등사가 있는 삼랑성에 올랐다. 비가 많이 내리고 시간이 늦어서인지 행사는 실내에서 하는 학술 세미나뿐이었다. 어느 스님에게 가궐터를 물었더니 ‘이 길을 따라서 저쪽으로 끝까지 가면 된다’고 얘기했다. 그 길을 따라서 갔더니 막다른 곳인데, 가궐터 푯말이 안 보였다. 언덕에 평평한 제법 큰 집터가 있었으나 그곳에는 ‘강화 정족산성진지(鼎足山城陳地)’ 안내판만 있었다. 인천광역시 기념물이었다. 전등사 종무소에 들어가 가궐터가 어디인지 물으니, 그곳이라고 일러줬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고려시대 삼랑성 가궐터로 전해왔는데, 2009년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 정족산 사고를 보호할 목적으로 세운 군사 주둔지인 정족진(鼎足陣)이 있던 곳임을 알려주는 유적은 발굴했으나 고려시대 가궐터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궐터 안내판은 세우지 못하고 정족진 안내만 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물론 이곳이 삼랑성 가궐터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삼랑성 가궐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 고려시대 역사서에는 삼랑성에 가궐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뒤 지금의 강화읍에 개성을 본떠 궁궐을 지은 것도 모자라 강화 이곳저곳에 별궁(別宮), 이궁(離宮), 가궐을 세웠다.
별궁만 해도 수창궁(壽昌宮), 용암궁(龍嵒宮), 진암궁(辰嵒宮), 제포궁(梯浦宮) 등이 있었고 흥왕리에는 이궁을, 삼랑성과 신니동에는 가궐을 각각 지었다.
삼랑성에 가궐이 지어진 것은 고종 재위 46년이던 1259년 4월이었다. ‘고려사절요’에는 ‘(왕이) 임시 대궐을 삼랑성과 신니동(神泥洞)에 짓도록 명령했다’고 기록돼 있다. 신니동 가궐터가 어디인지는 아직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은 상황이다. 그리고 2개월여 뒤에 고종이 세상을 떠났다.
고종이 삼랑성과 신니동에 가궐을 짓도록 한 것은 술사(術士) 백승현(白勝賢)의 말에 따른 거였다. 술사는 지금으로 치면 앞일을 예측하는 무슨무슨 법사니 하는 그런 부류로 읽힌다. 왕업을 연장할 방도를 묻자 백승현이 삼랑성과 신니동에 가궐을 지으면 된다고 알려준 것인데, 왕은 가궐을 짓도록 명령한 뒤 2개월여 뒤에 죽었다.
그 뒤로 왕위에 오른 원종은 삼랑성 가궐에는 얼마나 왔다 갔는지 기록돼 있지 않지만 신니동 가궐에는 갔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절요’ 원종 5년(1264) 6월에 ‘(왕이) 신니동 가궐에 옮겨 거처하였다’고 기록했다. 이를 토대로 보면, 강화에 있던 왕들은 강화읍 궁궐을 떠나 강화 여러 지역에 나뉘어 세운 별궁, 이궁, 가궐 등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추정할 수 있다.삼랑성과 신니동의 가궐터를 찾아내는 일도 강화도와 고려를 연결하는 통로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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