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량 타협 않은 도쿄 유학생들 신념… 돕고 기록하며 후세에 전한 의지
1919년 2월8일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궈 낸 2·8 독립선언은 중국 상하이, 조선, 미국 등지에서 움직이던 독립운동가들과의 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2·8 독립선언이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연결되는 이유다. 경인일보 광복·창간 80주년 특별기획 취재팀은 중국과 일본 등지에 흩어진 독립운동 흔적을 쫓아 그 ‘연결성’을 찾았다. 당시 일본 내부에서 일어났던 민주주의적 사조 ‘다이쇼 데모크라시(Democracy)’의 영향을 받은 일본인 활동가들도 우리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 관련 활동을 도왔다. 이들의 연대는 2·8 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유학생들의 재판과정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일본사회 알려지길 꺼린 일제 재판 ‘속도’
‘국헌 문란’ 인정하자는 다른 변호인들에
후세 다츠지 ‘선언’ 정당성 주장하며 비판
조선 청년들의 숭고한 뜻·긍지에 경의
■ 독립선언 확산 막고자 재판 서두른 일제
도쿄 2·8 독립선언 직후 체포된 조선인 유학생 28명 가운데 핵심 인사인 조선청년독립단 실행위원 최팔용(1891~1922·와세다대 재학), 서춘(1894~1944·도쿄고상 재학), 김도연(1894~1967·게이오대 재학), 김철수(1896~1977·게이오대 재학), 백관수(1889~1950·메이지대 재학), 윤창석(1894~1966·아오야마학원 재학), 송계백(1896~1920·와세다대 재학), 김상덕(1891~1956·세이소쿠영어학교 재학), 이종근(1895~1975·동양대 재학) 등 9명이 기소됐다. 이들은 재판이 진행되는 수개월 동안 요츠야형무소에 수감됐다.
재판은 빠르게 진행됐다. 일본 당국은 조선인 유학생들을 신속하게 처벌해 독립운동의 확산을 막고자 했고,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에 담긴 식민지 지배의 오점이 일본 사회에 알려지길 꺼렸기 때문에 재판을 서둘렀다.1
1심 재판은 2월15일 오전 도쿄지방재판소 형사부 제2호 법정에서 시작됐다. 300여 명의 조선인 유학생이 법정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다야마 재판장은 피고인들이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인쇄물을 일본어, 영어 등으로 인쇄하고 배포해 출판법 제26조를 위반했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1심 결과, 조선인 유학생들은 금고 7개월에서 1년 사이의 형량을 각각 선고받았다.
일본 조선기독교청년회(현 재일본한국YMCA) 백남훈(1885~1967) 총무가 구속된 학생들을 위해 변호사 비용을 모금하고 옥바라지를 도맡았다. 백남훈은 1심 판결 이후 일본 사법부의 ‘날림 재판’으로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이 묻힐 것을 우려해 저명한 변호사를 수소문했다고 한다. 당시 현역 중의원이었던 하나이 다쿠조(1868~1931), 우자와 소메이(1872~1955) 등 변호사들이 2·8 독립선언 사건의 변호를 맡았다.
그리고 훗날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도운 일본인 변호사로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되는 후세 다츠지(1880~1953)가 유학생들의 2심 재판부터 무료 변론에 나서게 된다. 2·8 독립선언은 후세가 맡은 첫 조선인 독립운동 사건이다.
■ 판결 유불리 떠나 독립정신 지지한 변호인
도쿄 2·8 독립선언 사건의 쟁점은 피고인측 변호인단 내부에서 발생했다.
하나이는 이 사건이 ‘국헌 문란’이기 때문에 국법(일본법)상 ‘유죄’를 인정한 상태에서 집행유예 등 감형을 주장하는 게 피고인들에게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우자와는 한·일 강제 병합이 ‘일본의 몸체에 행랑을 붙인 것’과 같기 때문에 행랑이 없어진다고 해서 일본의 국체가 파괴될 일은 없으므로, 국헌 문란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펼쳤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로 형량을 줄이자는 취지의 변론 전략이었다.
“대체 조선을 뭐라고 생각하는가?”
후세는 두 변호인들의 변론 전략을 이같이 비판했다고 한다. 후세는 일본의 부당한 식민지배에 저항한 2·8 독립선언 참가 학생들의 주장이 정당하다고 봤다. 감형에 치중한 변론보다 조선 청년들의 숭고한 뜻과 긍지를 지켜주고자 했다.2
같은 해 3월21일 2심 판결과 6월26일 최종심 판결에서 최팔용과 서춘만은 금고 1년에서 9개월로 감형됐고, 나머지 피고인들은 1심 판결이 유지됐다. 재판 결과만 보면 후세의 변론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인 유학생들은 유죄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일본 사회에서 2·8 독립선언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시기 후세는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는 글을 발표해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최종 판결 이후 피고인들은 이치가야형무소로 이송돼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2·8 독립선언 실행을 위해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메신저’ 역할을 했던 송계백은 이듬해 폐렴으로 옥중 순국했다.
변호비용 모금, 일본 조선기독교청년회
1906년 설립 재일본한국YMCA가 거점
2008년 지요다구 회관 다락 자료실 조성
100주년 맞아 기념사업, 2층 확장·이전
■ “자유와 독립 위해 혈전도 불사한다”
지난달 11일 오전 일본 도쿄 지요다구 재일본한국YMCA회관 내 2·8 독립선언 기념자료실의 통로 벽면에는 2019년 2·8 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 이곳을 방문했던 인천학익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의 ‘롤링 페이퍼’(여러 사람이 쓴 짧은 글들을 모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같은 문구들이 예쁜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북한에서 이례적으로 2·8 독립선언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기념자료실 측이 소장한 북한의 대중 월간지 ‘천리마’ 2006년 8월호에 수록된 글 ‘2·8 독립선언운동’에서는 “도쿄 한복판에서 재일조선 유학생들이 벌인 이 투쟁은 일제 침략자들에게 커다란 불안과 공포를 안겨주었으며 우리나라에서 전 민족적인 3·1운동의 폭발을 촉진시키는 데 중요한 작용을 했다”고 썼다.
대표적인 재일한국인 역사학자 박경식(1922~1998)은 그의 저서 ‘재일 조선인 운동사(8·15 해방 전)’에서 2·8 독립선언서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선언서는 우선 정의와 자유에 의해 세계 만국 앞에 독립을 기하는 것을 선언하고, 일본 군국주의의 부당한 침략과 불법한 ‘한국병합’ 및 이후의 야만적 지배정책을 폭로하고 규탄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병합’이 동양평화를 어지럽히는 화근이자, 우리 민족은 정당한 방법에 의해 민족의 자유와 독립, 생존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최후의 일인까지 뜨거운 피를 흩뿌릴 것을 불사한다. (중략) 2·8 독립선언서에 드러난 민족주의 사상은 명확하게 민족자결, 민족생존의 권리에 의한 자유와 독립을 주장하고, 그것을 위해 혈전도 선포한다는 혁명적 내용을 담고 있다.”3
■ 역사를 지키는 사람들, 주재형 재일본한국YMCA 총무
120여 개국에 퍼져 있는 세계 최대 청소년단체 YMCA는 ‘1개 도시 1개 YMCA’가 원칙이다. 일본 도쿄에도 ‘도쿄 YMCA’만 있어야 하지만, 1906년 설립된 ‘재일본한국YMCA’ 또한 자리 잡고 있다. 서울YMCA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역사가 깊은 곳이 재일본한국YMCA다.
재일본한국YMCA 업무를 총괄하는 주재형 총무는 2017년 3월 서울YMCA에서 도쿄로 옮겨 왔다. 그 전까지는 재일한국인 직원이 총무를 맡아 왔는데, 2019년 2·8 독립선언 100주년을 앞두고 각종 기념사업을 추진하고자 서울에서 파견된 ‘공인 일꾼’이다.
“2·8 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서울과 도쿄 간 원활한 소통이 필요했습니다. 아무래도 한국 사람들의 업무 스타일이 일본 사람들보다 추진력이 강하다 보니 제가 오게 된 거죠.”
주재형 총무 “자료실 방문객 70% 일본인”
“2·8선언때 옥바라지 백남훈 선배님 등
헌신하셨던 분들, 직장인이던 저를 바꿔”
애초 2·8 독립선언 기념자료실은 2008년 재일본한국YMCA회관 10층에 있는 협소한 다락에 조성돼 있었다. 주재형 총무는 더 많은 사람이 2·8 독립선언의 역사를 접할 수 있는 공간과 자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00주년 기념사업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기념자료실을 기존 공간보다 넓은 2층으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주재형 총무는 개인 사무 공간을 아카이브로 내주면서까지 기념자료실 확장·이전에 힘썼다.
“방문객의 70%가 일본 사람입니다. 일본인들은 역사 교과서에 2·8 독립선언 내용이 없어서 잘 몰라요. 그런데 기념자료실에 와서 보니, 조선 청년들이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을 부르짖은 큰 사건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죠. 2·8 독립선언 조력자였던 김마리아(1891~1944) 선생이 현재까지도 도쿄의 최고 명문 여학교인 ‘여자학원’을 나왔습니다. 여자학원 학생들이 기념자료실에 있는 선배 김마리아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더라고요.”
지금도 주재형 총무는 2·8 독립선언 기념사업을 이어가기 위해 일본과 한국을 바쁘게 오간다. 내년이면 재일본한국YMCA 창립 120주년이다. 내년 계획을 설명하던 주재형 총무는 잠시 울컥하다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2·8 독립선언 당시 유학생들의 재판과 옥바라지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백남훈 총무님은 저의 대선배입니다. 직장인의 한 사람이었던 제가 도쿄에 와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셨던 분들의 역사를 알아가고, 또 그것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면서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 깊어져, 일본에서 태극기만 봐도 가슴이 뜁니다. 2·8 독립선언은 일본에 있는 우리 교민들의 자부심입니다.”
※ 위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출처]
1) 전병무, ‘후세 다츠지 평전’, 역사공간, 2022, 76~77쪽
2) 전병무, 같은 책, 75~76쪽
3) 김인덕, ‘재일조선인 민족운동과 2·8독립운동 - 박경식의 서술 내용을 중심으로’, 월간 ‘순국’ 통권 제409호, 2025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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