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목욕탕엔 밥솥이 있습니다… 둘러앉으면 모두 ‘식구’니까요

 

대형 사우나·찜질방에 밀려난 ‘탕’

수십년간 운영한 부부, 단골들과 고락

손님이 반찬 챙겨 함께 식사·수다도

오가며 만남 “주부들 이런 시간 중요”

남탕 20여년전 폐업… 여성 전용 유지

“지금까지 찾아줘 고마워, 베풀어야”

“그 목욕탕 아직 있어… 딸과 통화

없어질 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에 있는 무등탕.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에 있는 무등탕.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검색창에도 나오지 않는 무등탕을 처음 간 날, 이슬비가 내렸습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는데 저 멀리 ‘목욕합니다’라는 입간판이 보였습니다. “아직도 이런 목욕탕이 있구나.”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처음엔 분명 새하얐을 만한 나무입간판은 이제 껍질과 함께 군데군데 벗겨졌고 ‘목욕’이라는 빨간 글씨 역시 바래져 있습니다. 입간판에서부터 “여기 오래된 곳이오” 말하는 듯했습니다.

입간판이 세워진 골목길로 들어서니 ‘여성전용 무등탕’이라 적힌 유리문이 나옵니다. 유리문을 지나 한 계단 반을 오르면, 매표소가 보입니다. 작은 미닫이 창문이 달려 있고 그 옆으로는 A4용지 반절 크기에 직접 손으로 적은 ‘요금표’가 붙어 있습니다. ‘일반 8,000원, 소아 5,000원’. 손님이 오면 사장님이 스르륵 작은 창문을 열어 인사하고 수건 2장을 건넵니다. 여탕은 자고로 수건 2장이 기본이죠.

여탕에 들어가면 키만 대면 자동으로 열리는 신발장 대신, 7단 신발장에 신발들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올리브색 두툼한 커튼을 젖히면 증기가 목욕탕을 가득 채울때 나는 ‘푸근한 물 냄새’가 반겨줍니다.

“목욕탕에 왔구나” 실감나게 하는 그 냄새 맞습니다. 커다란 거울 양옆에 드라이기가 걸려 있고 거울 아래 나무 벽 선반 위에 빗과 면봉, 여성로션, 두루마리 휴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맞은편에는 수건이 걸린 옷걸이 두어 개, 옥색 바탕의 철제 옷 사물함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사물함 위에는 알록달록한 목욕바구니가 줄지어 놓여 있고 빛이 바랜 에어컨이 짱짱한 찬바람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사물함 위에 알록달록한 목욕바구니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사물함 위에 알록달록한 목욕바구니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20여년 전 할머니 손 잡고 오던 동네 목욕탕처럼, 냉장고에는 항아리 모양 바나나 우유와 비타민 음료가 채워졌고 맨 아래칸에는 반찬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냉장고 앞에는 나무 평상이, 그 옆에 밥솥이 있죠.

우리는 보통 한 집에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을 ‘식구’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기억처럼, 무등탕에 오면 여기 온 손님들에게 또 다른 집이 펼쳐지고 무등탕을 운영하는 이희자(72) 사장은 ‘목욕탕 언니’가 됩니다.

“나를 언니라고 해요. 여기서 (손님들이랑) 함께 밥먹고, 어떤 손님은 맛있게 먹었다고 5만원을 송금해. 그걸로 음료나 이런 거 사서 나눠 먹으라고. 그만큼 맛있게 먹었다는 거지. 여기서 밥을 하기도 하고 손님들이 (음식을) 챙겨오기도 해요. 그냥 같이 밥 먹으면서 돈 다 필요 없으니까 먹고 쓰고 놀자 이런 얘기나 하는 거지 뭐.”

함께 밥을 먹는 식구는 매번 달라집니다. 무등탕의 분위기가 좋아 10년을 일했다는 노정숙 세신사는 밥을 차렸을 때 목욕탕에 있으면 그날의 식구가 되는 거라고 말합니다.

메뉴도 매번 달라지는데 주로 제철 음식이 오릅니다. 감자를 좋아하는 언니가 푸짐하게 쪄서 내오기도 하고, 겨울에는 달걀을 삶아 먹습니다. 밥만 먹고 땡이 아닙니다. 목욕하고 가는 손님들 손에 비닐봉지를 하나씩 건넵니다. 사장 부부가 직접 수확한 채소를 전해주는 거죠.

만 원도 안 되는 돈을 내고 목욕하러 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수다도 떨고 단골손님들이 말하는 무등탕의 매력입니다. 30년 단골인 이혜숙 어머님이 여전히 무등탕을 오는 것도 이 매력에 푹 빠졌기 때문입니다.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오는 거야. 다른 곳 가면 어색해. 낯설기만 하고,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보던 사람이 좋더라고. 다른 목욕탕 가면 다른 집에 간 거 같아.”

사실 언제 모일지 정하지 않습니다. 오다가다 만나면 그때마다 사랑방이 되고 그렇게 오랜 시간 얼굴 보며 밥을 먹다 보니 가족같은 관계가 되는 거죠. 이희자 사장은 특히 주부들에게 이런 시간들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맛있는 음식 먹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말이죠. 그래서 목욕탕 언니는 기본 30년은 다녀야 단골손님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지금도 와서 그렇게 얘기해요. 여기(무등탕) 30년 넘게 다녔다고. 자기 딸이 호주에 가 있는데 가끔 통화하면 ‘그 목욕탕 아직도 있다. 얼마나 좋은지 몰라. 집도 가깝고’라고. 그 손님 딸이 한 마흔 몇 살 됐을걸요. 아무튼 애기 때 같이 왔으니까(그런 얘기를 하겠지) 여기 다 그 정도 다닌 손님들만 와요.”

어쩌면, 여탕만 살아남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무등탕 2층은 원래 남탕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익이 나지 않아 20여년 전 문을 닫았죠. 40년 넘게 한자리를 지키는 여탕과 달리 말입니다. 목욕탕 언니와 단골손님, 세신사들이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사랑방 모습을 간직해 무등탕의 여탕을 지킨 셈이죠.

40여년간 무등탕을 운영해 온 김두만(오른쪽)·이희자 부부. /박소연PD parksy@kyeongin.com
40여년간 무등탕을 운영해 온 김두만(오른쪽)·이희자 부부. /박소연PD parksy@kyeongin.com

무등탕은 김두만(77)·이희자 부부가 40여년 전 함께 문을 열었습니다. 휴식공간이 있는 찜질방, 한증막이 있는 요즘의 사우나와 달리, ‘기본’에 충실한 공중목욕탕입니다. 과거 수원 이목리에 있던 해태유업에서 ‘기관장’으로 일한 김두만 사장님은 보일러 기술을 살려 무등탕을 열었고 물을 데우는 것부터 김두만 사장님의 손을 안 탄 곳이 없습니다. 지금도 문제가 생기면 김 사장님이 직접 고칩니다. 김두만 사장님은 가진 것이 없어 기본만 두고 장사했다지만, 단골손님들은 그게 무등탕의 매력이라고 강조합니다. “재래식 시장처럼 재래식 목욕탕이라고 하죠. 옛날 그 모습 그대로라 이 동네 사람들이 여기만 오지 않나 싶어요.”

수원 무등탕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재래식 목욕탕이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수원 무등탕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재래식 목욕탕이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지금이야 동네 공중목욕탕을 찾기 어려워졌지만, 과거에는 무등탕 주변에도 여러 공중목욕탕이 있었습니다. 특히 90년대 말에는 목욕탕이 ‘핫’했죠. 옛날에 했던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만 봐도 목욕탕 주인집을 부유한 집안으로 표현했습니다. 목욕비 600원으로 시작했던 무등탕도 옛날에는 남탕에 이발사를 둘 정도로 황금기가 있었습니다. 여탕에서는 큰 고무대야에 설거지를 해야 할 정도로 많은 손님이 오갔다고 합니다. “그때는 (손님들이) 돈을 잘 썼어요. 그때 많이 먹었지. 여성 손님들 중에서는 (여기서) 술 먹는 사람들도 많았어.”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무등탕 이용자 수칙.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무등탕 이용자 수칙.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그러나 집집마다 샤워시설이 갖춰지고 2000년대 초반 대형 사우나, 대형 찜질방이 문을 열면서 동네 목욕탕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췄습니다. 무등탕도 위기를 겪었습니다. 사장님 부부도 고민이 많았지만, 큰 욕심내지 말고 지금까지 찾아준 손님들께 베풀며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목욕탕 문을 여는 시간이 새벽 3시로 당겨진 것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사람이 없을 때 목욕하고 싶다는 단골손님 요청에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무등탕 여탕 안에는 나무 평상과 냉장고, 밥솥 등이 놓여 있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무등탕 여탕 안에는 나무 평상과 냉장고, 밥솥 등이 놓여 있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처음 무등탕 문을 열 때 사장님 부부도 여느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시작했습니다. 그랬던 목욕탕이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이 되었고, 나눔의 공간이 되었으며, 이제는 없어져서는 안 될 추억을 간직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목욕탕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런 생각은 정말 해본 적이 없어요.” 무등탕이 문 닫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단골손님의 말처럼, 사장님 부부는 오늘도 목욕탕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합니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