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쿠데타 청산·관세전쟁 진통 불구
한국, 낙관적 전망 우세 사회적 잠재력 덕분
배움 빠른 ‘早熟性’ 도움… 깊이 결핍은 과제
한국은 복합적 위기 상황이다. 안으로는 윤석열 정부가 일으킨 12·3 비상계엄과 쿠데타를 청산·극복하는 과제로 진통을 겪고 있으며, 밖으로는 트럼프 행정부가 일으킨 관세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율을 무기로 요구하고 있는 천문학적 패키지투자가 가장 어려운 도전이다. 우리 정부는 반도체와 조선산업이라는 지렛대는 물론 자주국방론까지 활용하며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다.
국가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낙관적 전망이 우세한 것은 사회적 잠재력 덕분이다. 한국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문화적 트렌드 세터이다. 팝음악과 드라마 영화 등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한류(Hallyu)의 원조국가이며 화장품, 음식, 패션 등의 흐름을 선도하는 문화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 70년대까지 한국은 음악을 비롯한 대중문화의 후발국가였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앞두고 찬반론을 벌이던 것이 1998년도였다. ‘두려움에 떨며’ 영화, 애니메이션, 공연, 음반, 게임, 방송프로그램 영역까지 전면 개방한 제4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2004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K-Pop 기획사들은 1980~90년대 일본의 ‘아이돌 산업 시스템’을 신속히 학습하여 한국적 문화산업으로 바꾸었다. 기술적 완성도와 디지털 감각을 더해 J-Pop과 전혀 다른 차원의 대중음악을 만들어 낸 것이다. 새로운 팬 서비스와 팬덤 경영 방식을 도입하고 K-Pop 특유의 멀티미디어 스토리텔링 전략으로 세계관적 깊이를 갖춘 콘셉트로 발전시켜 세계적 트렌드가 되었다.
한국의 역동성을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압축성장론이었다. 한국은 식민지 지배와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를 짧은 기간에 압축적으로 경험했다. 후발주자로 살기 위해 남보다 빨리 배우려는 사회적 환경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선진국 반열로 발전시켰다는 설명이다. 문화 연구자들이 모이면 한국의 대변신 요인을 산업시스템에서, 민족 문화적 특성에서, 혹은 정보화와 플랫폼 기반 확산능력에서, 국가전략에서 찾는다. 모두 그럴듯하다. 그러나 대상을 한국의 반도체나 조선, 원전이나 방위산업과 같은 산업적 기술우위, 그리고 역동적 한국 민주주의로 넓히면 논거가 부족해진다. ‘신명론’으로 반도체산업을 설명해낼 수 없듯이.
‘조숙성(早熟性)’도 하나의 열쇠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인들은 배우는 속도가 놀랄만큼 빠르다. 경제발전, 민주화, 정보화를 모두 두 세대 안에 이루었다. ‘조숙성’은 90년 전 경제사학자 백남운이 조선사회의 경제구조를 분석하면서 제시한 개념이기도 하다. 당시 식민사학자들이 한국의 봉건제도가 미성숙·정체적 상태로 근대로의 이행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백남운은 조선 후기사회의 자본주의 맹아를 제시하며 오히려 빠른 발전과 내적 역동성을 지닌 사회라고 주장했다.
한국인의 숭문주의와 학습문화도 주목할 요인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라는 공자의 말을 실천한다. 배움을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목표로 여기는 독특한 학습문화의 전통이 있다. 배우는 것을 즐기는 태도는 지식을 수단이나 방법으로 여기는 서양이나 일본인의 실용적 경향과도 다르다. 문해력을 높인 건 한글이다. 표음성과 규칙성을 갖춘 한글은 디지털 환경에서 ‘학습하는 민족’의 날개를 달아 준 격이다.
그렇다고 조숙성을 민족 기질론으로 축소하면 이른바 ‘국뽕’이 되고 만다. 한국인의 조숙성은 유교적 수양정신, 역사적 생존경험, 언어적 논리성, 그리고 기술적 적응력이라는 여러 요소의 결합이다. 학습을 경쟁이 아닌 수행으로 생각한 깊은 인문정신, 집단학습 속도를 높인 논리적이고 규칙적인 언어인 한글, 억압 정치를 용납하지 않은 민주주의 역량, 공동체 중심의 사회문화와 디지털환경과의 융합이 K-pop으로 그리고 한류로 개화한 것이다. 조숙성은 속도로 인해 깊이의 결핍을 남긴다. 한국이 겪고 있는 진통과 위기는 그 결핍에서 오는 것. 우리는 더 깊은 민주주의, 사람의 세상으로 가는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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