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설·공간, 훌륭한 소프트웨어 담아내
1727석 콘서트홀 하나로 버틴 아트센터인천
오페라하우스 건립 중투심 통과소식 반가워
오스트리아 빈에 가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주 콘서트홀인 ‘무지크페라인’(Musikverein)이다. 여러 개의 크고 작은 홀이 있는데 이름 그대로 ‘그로서 잘’(Großer Saal, 대공연장)이 으뜸이다. 내부 장식이 금빛으로 화려해서 ‘황금홀’이라고도 부른다. 1천744명이 앉을 수 있는 관객석과 300여 명이 들어설 수 있는 입석 공간을 갖췄다.
이 홀에서 해마다 1월1일이면 열리는 빈 필의 신년음악회는 국내 영화관에서도 생중계된다. 벌써 10년이 넘었다. 요한 스트라우스 일가의 작품들 가운데 주로 왈츠와 폴카 등 활기찬 곡들로 구성된다. 아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와 아버지의 ‘라데츠키 행진곡’은 앙코르의 핵심이다. 이 앙코르를 즐기려 신년음악회에 간다는 사람들도 있다. 라데츠키 행진곡에 청중들이 손뼉을 치면서 박자를 맞추고 어깨를 들썩이며 마무리되는 음악회는 우리에게도 이제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벼르던 끝에 동유럽 여행에 나서면서 무지크페라인을 일정에 넣은 건 당연한 일. 마침 그로서 잘에서 디아나 담라우(Diana Damrau)가 오페레타 서곡들을 모아 부르는 공연이 딱 하루 잡혀 있다. 20여 년 전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맞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공연된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새로운 ‘밤의 여왕’으로 등극했던 그녀다. 빈 필을 들을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담라우만으로도 설렜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절정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는 볼 수 없을 터이나 그래도 괜찮다.
그런데 결국은 지우지 못한 버킷리스트로 남았다. 좀 멀긴 해도 무대가 잘 보이는 중앙 발코니 좌석까지 예매했는데 공연 일주일 전 갑자기 취소됐다. 가족이 세상을 떠서 부득이 공연을 미루게 됐단다. 이메일을 받고선 맥이 탁, 풀렸다. 타인의 슬픔이 나의 욕망을 점잖게 누르지 못했다. 빈에서 며칠 머무는 내내 베이지와 테라코타 색상이 어우러진, 그 우아하고 창연한 건물이 눈에 밟혔다.
아쉬움이 컸던 건 그로서 잘을 배경으로 인생 한 컷을 남기지 못해서가 아니다. 대단한 클래식 애호가여서 그곳 방문을 성지 순례처럼 여겨서도 아니었다. 하드웨어로서의 특정한 문화 시설과 공간에 소프트웨어로서의 특정한 문화 콘텐츠가 어떻게 제 모양과 제 색깔을 잃지 않은 채 오롯이 담겨 나오는지를 현장에서 직접 보고 싶었다. 그게 무산된 거니까.
어떤 문화든 싹을 틔우고, 가지를 키우고, 줄기를 세우며, 꽃을 피워내는 과정을 거친다. 발아(發芽)는 우연일 수 있지만 이후의 생장(生長)은 필연이다. 가지를 소란스럽게 키우고, 줄기를 부풀려 세우며, 꽃을 흐드러지게 피워내는 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나는 무지크페라인을 그런 생장의 하드웨어로 이해했다. 좋은 하드웨어가 있어야 훌륭한 소프트웨어를 담아낼 수 있다. 물 빠짐이 좋고, 공기가 잘 통하는 콩나물시루가 통통하고, 아삭하고, 빛깔 좋고, 비린내 나지 않는 콩나물을 길러낸다. 그런 콩나물시루가 없거나 부족한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서 갈증이 더 컸을 것이다.
아트센터 인천의 2단계 사업인 오페라하우스 건립이 삼수 끝에 정부의 중앙투자심사를 통과했다는 소식은 그래서 더더욱 반갑다. 내후년 하반기쯤 착공 가능하다는 시간표도 있다. 2018년 무지크페라인의 그로서 잘과 거의 같은 규모인 1천727석으로 개관한 콘서트홀 하나로 근근이 버텨온 아트센터 인천이다. 몇 년 뒤 지금의 콘서트홀 옆에 1천400여 석 오페라하우스까지 갖추게 되면 그제야 300만 시민의 제대로 된 문화 하드웨어로 기능하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 파리나무십자가소년합창단이 아트센터 인천에서 공연할 때 손잡고 간 초등학교 2학년 외손주가 물었다. 콘서트홀 옆 쉼터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현장, 콘크리트 맨바닥 위로 세우다 만 철근 골조가 마른 갈대처럼 멈춰 서 있는 공간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학교를 졸업할 때쯤 저 휑한 자리에 공연의 전당이 새로 들어서고 유쾌한 오페라 한 편 같이 보면 녀석에게 멋진 졸업선물이 되려나. 그때도 여전히 따라나서 줄지나 모르겠네.
/이충환 언론학 박사·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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