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마포구 동교동 178-1. 동교동 사저는 김대중(DJ·1924~2009) 전 대통령의 정치역정이 서린 한국 민주주의 본산이다. 1960년대 초반 입주해 2009년 별세 때까지 부인 이희호 여사와 거주했다. 단순한 거주공간의 의미를 초월한다. 군사독재 정권의 가택연금 탄압을 55차례 견뎌낸 투쟁 현장이다. 동료들과 정치적 비전·국가의 미래를 고민하던 아지트로 ‘동교동계’라는 별칭이 비롯된 곳이기도 하다. 미국 망명(1982.12~1985.2)과 1992년 대선 패배 후 영국 유학시절 6개월, 일산 사저 거주(1996.8~1998.1), 대통령 재임 시기(1998.2~2003.2)를 제외하고는 줄곧 이곳에 머물렀다.

이희호 여사는 분쟁을 예감한 듯 별세 2년 전인 2017년 유언장을 작성했다. “동교동 사저를 김대중·이희호 기념관으로 사용하라. 만약 지자체 및 후원자가 매입해 기념관으로 사용하게 된다면 보상금의 3분의 1은 김대중기념사업회에 기부하며, 나머지 3분의 2는 김홍일·홍업·홍걸에게 균등하게 나눈다.” 사전에 교통정리를 해뒀지만, 삼남 김홍걸 전 의원의 변심으로 법적분쟁까지 번졌다. 동교동 사저는 DJ 탄생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 7월 100억원에 민간 매각되고 말았다. 상속세 17억원 때문이라는 변명은 당혹스럽다.

우여곡절 끝에 동교동 사저는 국가등록문화유산이 된다. 정부나 지자체·기관의 재매입은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마포구청은 서울시에 신청서를 냈고, 시가 국가유산청에 다시 제출했다. 국가유산청은 지난 28일 조건부 가결했다. 명칭은 ‘서울 동교동 김대중 가옥’이다. 최종 등록되면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법적 보호를 받게 된다. 소유주 박모씨는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같이 떠오르는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 연설문, 국립현충원 김대중 대통령 묘비명에서)” ‘인동초(忍冬草) 정치인’ DJ의 삶은 넘어짐의 연속이었다. 숱한 투옥, 테러, 망명, 가택 연금, 사형 선고 등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들을 겪었다. 꺾이지 않는 민주주의 열망, 평화통일 의지… DJ 생전의 행적과 사상은 동교동 사저에 오롯이 남아있다. 국가와 국민이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동교동 사저 안 김대중 정신이다.

/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