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 촛불을 들고 약속했다… 두 소녀의 이름을 잊지 않기로

‘붉은악마’의 함성이 광화문 광장을 뒤덮었던 2002년, 경기도 ‘의정부 동부역 광장’에는 수십개의 촛불이 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종이컵에 촛불을 끼워 불을 밝혔다. 그 앞엔 흰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여성이 하얀 천을 하늘 위로 휘날렸다. 그 모습이 처연하고 한스러웠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동네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며 웃고, 화가와 디자이너를 꿈꾸던 14살의 어린 영혼을 위로하고, 그 죽음을 알리기 위한 소녀들의 소리 없는 외침이었다. 신효순·심미선 양은 같은 해 6월 13일 양주군(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56번도로에서 미군 장갑차에 무참히 짓밟혀 죽었다. 이른바 ‘효순이미선이사건’이다.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신효순·심미선 양

경인일보 보도로 세상에 처음 알려진 참변

 

‘미군 공무중 발생한 사건은 미군에 재판권’

SOFA 조항에 조사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

효순·미선 양의 죽음은 경인일보 보도로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경인일보 김환기 기자는 당시 양주, 동두천 등을 담당했던 의정부경찰서 당직사건에서 여중생 2명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졌다는 사건기록을 확인했다. 곧바로 양주시를 담당했던 이상헌 기자가 기사를 썼고 2002년 6월 14일자 신문으로 보도됐다. 이상헌, 김환기 기자와 함께 북부를 담당했던 최재훈 기자는 당시 사건을 이렇게 기억했다.

“우리(경인일보)가 1보를 처음 썼어요. 그 후 효순·미선이 언니랑 친구들이 미 육군 제2사단사령부가 있는 의정부시 가능동 레드 클라우드 캠프(CRC) 앞에 찾아가서 살려내라고 울기도 했어요. 근데 2002년 한일 월드컵 이슈가 너무 커서 다 묻혔지. 시신도 사고 현장에서 바로 치워지고…. 그러다가 효순이와 미선이 시신을 보관하던 영안실 직원한테 전화가 왔어요. 시신 훼손이 너무 심하고 심상치 않다고.”

경인일보 2002년 6월 14일자로 보도된 여중생 장갑차 사망사건 기사.
경인일보 2002년 6월 14일자로 보도된 여중생 장갑차 사망사건 기사.

효순·미선의 언니랑 친구들이 레드 클라우드 캠프 앞에 찾아가 살려내라고 울기도 했는데… 2002 한일 월드컵 이슈에 묻혔지

당시 미군이 한국인을 해하는 이른바 ‘행협(한미행정협정) 사건’은 경기 북부에서 너무 빈번했다. 그러나 매번 경찰·검찰 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1966년 7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체결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때문이다. 미군 공무 중 발생한 사건은 미군에 재판권이 있어 사실상 한국의 조사·재판은 불가능하다. 살인 등 12개 중대범죄를 저지를 경우 검찰에 기소할 때 미군의 신병 인도가 가능하지만, 기소 전 신병 인도는 미군 판단에 따라 이뤄져 제한적이다. 사실상 미군한테 한국은 무법지대나 마찬가지였던 것. 그렇다 보니, 당시 북부 주민들은 “미군과 관련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다. (경인일보 2002년 7월 7일자)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미군 장갑차 희생 여중생 49재 행사에서 참석자들이 효순.미선양 영정을 앞세우고 경찰과 대치하며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2002.7.31 /연합뉴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미군 장갑차 희생 여중생 49재 행사에서 참석자들이 효순.미선양 영정을 앞세우고 경찰과 대치하며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2002.7.31 /연합뉴스
경인일보 2002년 7월 28일자로 보도된 미군 관계자 참고인 소환 기사와 사진.
경인일보 2002년 7월 28일자로 보도된 미군 관계자 참고인 소환 기사와 사진.

“미군 잘못없다” 미군 고위 간부 발언 촉발

경기북부 주민들 매일 피켓 들고 거리 시위

 

배심원단 평결 따라 가해자 2명 모두 ‘무죄’

의정부 밝히던 촛불, 광화문 광장까지 번져

 

여전히 범죄 일어나고 불평등한 상황 지속

한미관계 두고 정치·이념적 목소리만 충돌

효순·미선 양의 죽음도 처음엔 다른 행협사건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이렇게 묻히기엔 그 정도가 너무 처참했고, 또 너무 어린 나이였다.(경인일보 2002년 7월 17일자) 여기에 그동안 쌓여온 북부지역 주민들의 분노, 효순·미선 양의 죽음을 두고 “미군의 잘못이 없다”는 미군 고위 간부 발언이 조용히 묻힐 뻔했던 사건에 불을 지폈다.

전국은 월드컵으로 뜨거웠으나, 경기 북부지역 주민들은 효순·미선 양 죽음으로 매일 눈물을 흘리며 피켓을 들었다. 경인일보 기자들은 그 모습을 끈질지게 빠짐없이 기록했다. 가해 미군과 미군 관계자들의 검찰 출석 현장도 최재훈 기자 카메라를 통해 최초로 경인일보 신문에 실렸다.

“가해 미군이 처음 검찰 조사 받으러 나올 때 검찰 건물 건너편 옥상에서 한참 기다렸다 찍었어요. 얼굴이 제대로 나온 건 경인일보 사진밖에 없을거야. 얼마 뒤에 행협사건에서 미군 장교가 처음 참고인 조사 받는 순간도 경인일보만 찍었어요. 누가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꼭 찍어서 기록으로 남기라고. 근데 출석도 비공개였고 (검찰과 경찰이) 하도 못 찍게 막아서 하수도 구멍에 숨어서 찍어 보도했지.”

2002년 11월 22일자 1면 보도된 미군 무죄 관련 규탄시위 모습. /경인일보DB
2002년 11월 22일자 1면 보도된 미군 무죄 관련 규탄시위 모습. /경인일보DB

그해 가을에도 의정부 동부역 광장에서 경기 북부 주민들은 촛불을 들었다. 미국 광우병 촛불시위,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운동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된 ‘촛불시위’의 시초였다. 지역민은 분노했고 정부도 미군에 재판권 이양을 최초로 요청했지만, 미군은 거절했고 SOFA의 벽을 뚫지 못했다. 같은 해 11월 주한 미8군 사령부 군사법원은 효순·미선 양을 죽게 한 가해 미군 2명 모두 배심원단 평결에 따라 무죄를 선고했고 이들은 얼마 뒤 한국을 떠났다. 불과 사건 발생 5개월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어린 목숨이 처참하게 죽었지만, 가해자도 책임지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월드컵 열기가 가라앉고 전국민이 이들의 죽음을 알게 되면서 의정부 동부역 광장을 채웠던 촛불은 광화문 광장으로 확대됐다.

미군범죄는 효순·미선이 사건 이전, 이후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1992년 동두천시 기지촌에서는 미군클럽에서 일하던 20대 여성이 미군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된 ‘윤금이씨 살해사건’이 있었다. 최근에는 미군 훈련 중 발생한 오발탄이 사격장 인근을 지나던 차량에 박히거나 미사일이 잘못 떨어지는 등의 사건사고가 발생했다.

이처럼 미군 관련 범죄는 지난해만 600건을 넘겼지만, SOFA 개정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았고 효순·미선이의 억울함 역시 풀리지 않았다. 단지 효순·미선이 평화공원을 조성하고 기록관을 세우며 시민들 스스로 이들의 억울함을 잊지 않으려 할 뿐이다.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을 추모하는 행사가 경기도내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수원 팔달문 중앙극장 앞에서 열린 촛불 추모행사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희생된 여중생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경인일보DB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을 추모하는 행사가 경기도내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수원 팔달문 중앙극장 앞에서 열린 촛불 추모행사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희생된 여중생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경인일보DB

권정호 변호사는 효순·미선이의 죽음을 기억하고 SOFA 개정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 왔다. 효순·미선이 사건처럼 큰 사건이 없었을 뿐, 여전히 미군 범죄는 일어나고 있으며 불평등한 상황은 여전하다고.

“만약 한국 군인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면 처벌 안 받나요. 지금도 미군 당국이 동의해서 (재판권을 넘겨주지 않는 한, 우리 국민이 중상해를 입거나 사망해도 재판권을 넘겨받을 수 없어요. 얼마나 억울한 상황입니까. 모든 미군 범죄에 재판권을 행사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미군에 재판권이 있더라도 우리 국민의 피해가 중대하고 극심한 경우, 사망한 경우 등에 한해 한국이 재판권 포기를 요청하면 이를 이양한다는 조항을 SOFA에 넣어야 합니다. 그게 제일 중요해요.”

주한미군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삶 한 편에 들어왔다. 누군가는 이들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누군가는 이들이 완전 철수해야 평화가 온다며 한미관계를 두고 정치적·이념적 목소리가 매번 세게 충돌한다. 효순·미선이 사건 당시 촛불시위 때도 같은 논란이 반복됐고 SOFA 개정을 외치던 목소리는 퇴색되어 버렸다. 효순·미선이 사건으로 촉발된 미군 범죄 문제는 이념의 문제가 아닌, ‘인권’의 관점에서 다시 살펴봐야 한다.

“(효순·미선이 사건) 촛불시위는 가장 평화적이지만 가장 강력한 수단인 ‘침묵’을 통해 우리 정부의 미국 의존적인 행태를 질타했고, 오만한 ‘팍스 아메리카나’에 경종을 울렸던 것이다. 이는 한민족의 인권선언이자 세계를 향한 평화의 메시지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2003년 1월 3일 경인일보 사설)

지난 2024년 6월13일 오전 경기 양주시 효순·미선 평화공원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추모제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은 추모 현장에 놓인 두 여중생의 영정 사진과 꽃. 2024.6.13 /연합뉴스
지난 2024년 6월13일 오전 경기 양주시 효순·미선 평화공원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추모제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은 추모 현장에 놓인 두 여중생의 영정 사진과 꽃. 2024.6.13 /연합뉴스

※기사 싣는 순서

① 촛불시위 시초 효순·미선이 그리고 미군

② 수도권 왓치독, 경인일보

③ 새벽에 홀로…어느 청년 노동자의 죽음

④ 벼랑 끝 자영업자 죽음의 진실

⑤ 사회의 가장 작은 목소리를 듣다

⑥ 경인일보가 30년 전 보낸 경고

⑦ ‘좌표 찍기’ 공무원 사망사건

⑧ 경기도 도시개발의 민낯

⑨ 왜 사회적 참사는 반복되나

⑩ 학대와 방임 속에 떠난 아이들

/신현정·공지영기자 go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