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 준비중 이주노동자 단속
몸 숨기던 베트남 유학생 추락사
사회적 약자들에겐 일상이 공포
자유란… 타인 자체 인정하는 것
화제의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백인우월주의자 록조의 주도 아래 군대까지 동원한 전쟁을 방불케 하는 난민 색출 작전이 진행된다. 이를 피해 도주하는 과정에 주인공 밥의 동지 세르지오가 묻고 답한다. “You know what freedom is? No fear.”(자유가 뭔지 알아? 공포가 없는 거야)
영화에 깊게 몰입할 수 있었던 건 현재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는 인종, 난민 차별 흐름, 최근 미국 조지아주에서 벌어진 한국인 노동자 폭력 구금과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상다반사로 벌어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폭력 단속이 겹치는 까닭이다.
영화는 자유를 공포, 두려움이 없는 것이라 말한다. 일반적으로 공포와 두려움은 약자(소수자)가 느끼거나 맞닥뜨리는 감정이고 제도화된 현실이다. 반대로 힘과 가진 것이 많은 이들이 느끼는 공포는 현재 누리고 있는 부와 권력의 상실, 그것을 지탱하는 토대의 상실이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난민에게 자유란 반인권적 폭력 단속과 강제 구금, 그리고 이어지는 강제 추방(출국)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신체 훼손, 실제로 발생하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추운 겨울 사용자가 집이라고 제공한 비닐하우스에서 얼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최근 경주 APEC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법무부의 대대적 단속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 출신 유학생이 목숨을 잃었다. 들이닥친 단속반을 피하다 몸을 숨긴 곳에서 추락해 목숨을 잃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6년을 공부하고 내년 초 귀국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들어간 공장에서 죽음을 맞이한 희생자는 심지어 미등록 신분도 아니었다.
폭행과 욕설, 성폭력, 성추행을 당해도 사용자의 처벌은커녕 다른 사업장으로 옮기는 것도 제약받는 이주노동자의 현실은 특정한 시기, 특정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예외적 상황이 아니다. 일상에서 체감하는 공포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와 가족 특히 자녀들에게 돌봄과 교육 등 복지 정책에서 제외되는 현실이 공포다. 지게차에 올려져 희화화되고 위험에 빠지는 상황이 보도돼야 그제야 들여다보는 현실이 공포요 두려움이다.
자국의 정치 상황에 의해 가해지는 탄압과 박해를 피해 과포장된 한국의 민주주의에 희망을 걸고 찾아오는 난민들이 있다. 하지만 입국을 불허 당해 공항 입국장에 발도 들이지 못하고 긴 시간 햄버거로 연명하며 불편한 의자에 제대로 다리도 펴지 못하고 쪽잠을 자다 결국 추방당할 수 있다는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들 난민 신청자에게 주어져야 할 자유다.
영화가 ‘백인 우월주의와 이에 대한 저항’을 기반으로 전개되기에 이주민, 난민에 관한 몇 개의 사례를 언급했지만 불확실한 재계약에 떠는 비정규 노동자, 차가운 시선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는 성소수자, 교육과 노동을 위한 이동이 제지, 제약당하는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가 마주하는 공포와 두려움은 일상이고 무한 반복된다.
이렇게 주위에 만연한 공포, 자유의 박탈은 소위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조장되고 법과 제도로 구체화 된다. 특히 차별과 혐오에 기반을 둔 정치인과 언론에 의해 아주 유력하고 효율적인 집표(集票)와 돈벌이의 수단이 된다. 이들은 좌표와 낙인찍기, 설정한 좌표와 낙인에 대해 무차별적 공세를 자행한다. 소유한 돈과 권력, 막강한 미디어를 통해서.
공포와 두려움을 통해 ‘자유’를 소환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차별받지 않을 자유’다. 언급했듯 공포와 두려움을 조장하고 누군가를 차별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발생하는 ‘이익’에 근거한다. 수탈 체제의 등장 이래 가진 자의 이런 논리는 늘 ‘자유’의 외피를 쓰고 등장했고, 기세를 떨쳤다.
이들이 만든 공포와 두려움을 걷어내는 과정이 ‘자유를 위한 여정’이다. 자유란 나의 존재를 그 자체로 인정받고 타인의 존재를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이다.
/한상진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정책기획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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