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어리 살어리랏다’… 애환으로 빚어낸 슬픈 운율
고려가요, 여몽전쟁 시기 태동 예상
도읍 이전에… 위정자 저항 의식과
바다 둘러싼 자연 ‘긍정 흐름’ 해석
고려가요 ‘청산별곡’과 ‘가시리’는 그 내용이 더없이 슬프고도 아름답다. 우리가 아는 많은 수의 고려가요는 슬픈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들 비장미의 고려가요가 여몽전쟁 시기 강화에서 태동했다는 시각이 많다.
중고등학교 국어 수업 시간이면 어김없이 듣게 되는 고려가요 ‘청산별곡’. 전체를 보게 되면 그나마 내용이 다가오는데, 교실에서 노랫말을 조각조각 분해해 놓으면 그렇게도 난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나 ‘얄리 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같은 후렴구는 기억한다. 이 ‘청산별곡’이 고려가 강화도를 수도로 삼았던 강도(江都) 시기 강화도에서 지어졌다고 보는 연구자들이 여럿 있다.
강화에서 청산별곡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쪽은 개성에서 급하게 강화도로 도읍을 옮길 때의 반발심과 애환을 담고, 백성들의 삶도 지켜내지 못하는 위정자들을 향한 저항 의식도 녹여내고, 그런 복잡한 감정이 강화에 새롭게 정착하면서 바다에 둘러싸인 강화의 자연을 긍정하는 흐름으로 이어진다고 해석한다.
특히 6연에 가면 ‘나마자기’ ‘굴’ ‘조개’ 같은 바닷가 먹거리가 등장하는데, 이게 다 강화도 갯벌에서 나는 것들이다. 나마자기는 우리가 나문재라고 부르는 염생식물이다. 나문재는 칠면초, 해홍나물과 섞여 불리기도 한다.
강화도 시인 함민복은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내용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소화해 ‘나마자기’라는 시에 풀어내고 있다. 함민복은 ‘…/얄리 얄리 얄라셩 망조 든 나라 슬퍼/굴조개랑 너를 먹고 산다 했던가/나마자기야/나마자기야/어찌 유서가 이리 아름답다냐’라고 노래했다. 함민복은 이렇게, 강화도 갯벌에 널린 나문재를 주인공으로 삼아 청산별곡을 다시 슬픈 아름다움으로 읊었다.
강화군 양사면의 향토지 ‘성덕(聖德)’에도 나문재와 청산별곡 이야기가 실려 있다. 봄이 오면 갯벌에 나문재 뜯으러 나가던 여인들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청산별곡의 내용과 연결짓고 있다.
‘성덕’에 따르면, 강화에서는 봄에 나는 나문재 어린 잎을 ‘해이(행이)’라고 불렀다. 해이가 점점 자라면서 붉은색을 띠게 되면 나문재라고 했다. 봄에 나는 나문재를 뜯어다가 나물 반찬을 만들어 먹었다. 봄이 지나면 억세져서 먹을 수가 없었다. 이 봄나물을 뜯으러 갈 때 여인들은 “해이(행이) 뜯으러 가자!”, “갱변(강변)으로 나무재(나문재) 뜯으러 가자!”라고 했다고 ‘성덕’은 전한다.
나문재를 소재로 한 작품 중에서는 이가림의 ‘나문재’보다 더 슬프게 하는 시를 찾기 어렵다.
‘…/가쁜 숨 몰아쉬며/익사하는 태양이/각혈하듯 검은 피 쏟아놓아/갯벌이 팥죽빛으로 어두워진 뒤에도/나문재 뜯으러 간 어메/영 돌아오지 않아//단발머리/깡마른 막내 고모의 등에 업혀/옴마한테 얼릉 가아,/ 옴마한테 얼릉 가아,/보채고 또 보채는/새까만 코흘리개 하나 있었느니//배고파서/부엉이 새끼같이 눈 껌벅이는/한밤중/쉰 나문재 몇 줄기/씹어 삼키고서야/가까스로 잠들었느니//…’
먹을 게 없는 집, 젊은 엄마는 어린애 먹이려고 나문재 뜯으러 갯벌에 나가 조금만 더 뜯으려다가, 기어다니는 게라도 몇 마리 더 잡으려다가 그만 뒤돌아오는 바닷물에 갇혀 돌아오지 못했던 모양이다. 시인은 당부한다. 노을 지는 갯벌에서 나문재 밭을 보거든 그저 붉은 꽃밭쯤으로 바라보지 말아달라고. 그래서일까. 강화도 나문재 밭에 가면, 고려의 ‘청산별곡’ 때부터 배어 있는 천년의 슬픔이 여태 가시지 않고 붉게 물들어 있는 듯하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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