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위기인데도 공 치는 위정자들
강도시기 궁궐 안팎 대규모 건설
최우의 ‘별난 사랑’ 이웃집 빼앗아
황금·비단으로 말장식·막대기 화려
전국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파크골프장을 더 만들어달라는 민원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파크골프가 노인층을 중심으로 크나큰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나라 골프 선수가 세계대회를 석권했다는 소식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골프는 잔디 위에 놓인 조그만 공을 막대기(클럽)로 쳐서 멀리 보내고, 그 공을 정해진 구멍(홀)에 넣는 경기다.
우리나라의 골프 열기가 요즘에만 뜨거운 것이 아니었다. 고려시대에도 대단했었다. 고려 때에는 이를 격구(擊毬)라 했다. 그 운동장을 구장(毬場) 또는 구정(毬庭)이라 칭했다. 말을 타고 공을 치기도 했으며, 말 없이 하기도 했다. 격구는 조선시대에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무인들이 득세한 고려만은 못했다.
고려가 강화로 수도를 옮긴 뒤 궁궐 안팎에는 거대한 규모의 격구장이 건설됐다. 강화읍내 궁궐 안 격구장은 궁궐 크기에 맞게 그 규모가 일반 필드 구장보다는 작았던 듯하다.
강화로 옮기자마자 한 일이 격구장, 궁궐, 절, 사당을 짓는 일이었다. 수도 이전 2년 뒤인 1234년 2월, ‘고려사절요’ 기록에는 “이때는 천도한 초창기인데도, 구정(毬庭)과 궁전과 사사(寺祠)의 이름을 송도를 본떴다”고 했다. 격구장의 이름까지 개성시대와 똑같이 했다는 얘기다.
그러면 그 격구장은 어디에 있었을까. 강화 향토사 연구자들은 강화읍내 고려시대 격구장이 지금의 용흥궁공원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강도(江都) 시기 최고 실권자 최우의 격구 취향을 고려시대 대문호 이규보의 문장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규보는 최우 소유의 커다란 누각에 대하여 글을 쓰면서 최우의 별난 격구 사랑까지 담아냈다.
이규보가 쓴 ‘최승제(최우)의 대루기(大樓記)’에 보면, 누각 남쪽에 마련한 최우의 격구장은 다른 곳과 달리 담장을 둘러 경계를 삼았다. 길이가 400보가 넘었으며 평탄하기가 숫돌 같았다. 직선거리가 400m에 달했다는 얘기다. 최우는 호화로운 술자리나 기생, 풍악보다도 격구를 좋아했다고 이규보는 썼다.
최우의 경우처럼 개인의 집 안에 마련한 격구장도 있었고, 왕실 소유의 격구장도 있었던 듯하다. 격구장에서는 격구만 한 게 아니었다. 군대 사열도 했고, 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도 했다. 스님들을 단체로 모아놓고 음식을 대접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의 스님 음식 대접을 반승(飯僧)이라 했는데 한 번 모이면 1만 명, 2만 명이었다. 그렇게 많은 수의 스님들이 한 곳에 모여 밥을 먹을 수 있는 장소로는 격구장 만한 곳이 없었다.
최우는 격구장을 마련하기 위해 백성들의 집을 빼앗기도 했다. 1229년 4월의 ‘고려사절요’는 “최우가 이웃집 1백여 구(區)를 점탈하여 구장을 지으니 동서가 서로 바라보기가 수백 보요, 평탄하기가 바둑판 같았다. 매양 격구할 때면 먼지가 일므로 반드시 동네 사람에게 시켜서 물을 길어다 뿌리게 했다”고 썼다.
최우의 격구 사랑은 아들 최항에게로 이어졌다. 최항이 자기 집에 고위 관료들을 불러 놓고 격구하고 활 쏘는 것을 구경했다는 기록도 여럿 보인다. 격구는 활쏘기와 말 타고 재주 부리는 희마(戱馬)와 함께했던 듯하다. 희마할 때의 말 장식도 황금과 비단으로 장식해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격구할 때의 기본 장비인 막대기, 즉 클럽도 은박으로 감싸는 등 화려하게 장식했다고 서긍의 ‘고려도경’에 소개돼 있다. 격구 클럽을 ‘구장(毬杖)’이라 했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경인일보 Copyright ⓒ kyeong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