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육강식 제국주의와 싸운 행동가… 그의 무덤은 오늘날 양심의 보루
“내가 여생을 바쳐 나라를 위하는 데에 유일하고도 가장 크게 의지하는 것은 천고에 길이 빛날 양심의 빛이오.”1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도쿄 유학생들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며 조선인에게 ‘우리의 변호사’로 불린 후세 다츠지(布施辰治·1880~1953). 그가 한평생 ‘양심’에 따라 삶을 개척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난 뒤 한 말이다. 후세는 법조인으로서 평탄한 삶을 살 수 있었음에도, 조선인들과 손을 잡고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제에 대항했다.
■ 신학자를 꿈꾸던 청년, 양심의 법조인으로
1880년 일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 헤비타촌에서 태어난 후세는 가난하지만 학문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의 배움 아래서 자랐다. 입신양명이 아닌 수준 높은 철학을 배우기 위해 도쿄로 향한 그는 러시아정교회 니콜라이당에서 일하며 종교 철학을 배우는 학생이 되기로 결심한다. 고향에서 접한 기독교 사상으로 러시아정교회가 익숙한 데다, 하숙비와 학비를 지원받으며 안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이야기로만 접하고 머릿속으로 상상해 온 도쿄 니콜라이 성당을 직접 마주했을 때의 후세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경인일보 광복·창간 80주년 특별기획 취재팀이 지난 9월 11일 오후 1시께 찾은 도쿄 치요다구 니콜라이 성당은 황금빛 촛대와 장식, 형형색색의 스테인드 글라스와 아치형의 높은 천장이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소년 후세는 이곳에서 청빈한 학문가를 꿈꿨을 것이다.
철학 배우려 미야기현서 도쿄로 상경
러 니콜라이 성당서 일하며 신학교 꿈꿔
‘행동하는 삶’ 다짐… 메이지법대 진학
1899년 8월 정식으로 입학시험을 통과한 그는 교장에게 학생 대표로 기도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때 후세는 내면에 꿈틀거리는 자신의 속물적인 모습을 발견한다. 기독교도로서의 마음보다는 안정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 탓에 신학생의 길을 선택한 그는, 결국 신학교 입학을 포기한 뒤 메이지법률대학(현 메이지대학)에 입학한다. 후세는 ‘양육강식의 현실’을 없애기 위해선 이를 실천할 철학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 길을 택했다. 학문에 골똘히 매진하는 것을 넘어 ‘행동하는 삶’을 살겠다는 후세의 첫 양심의 선택이었다. 이날 취재팀이 찾은 메이지대학 박물관에는 학교를 빛낸 역사적인 인물로 후세를 소개하고 있었다.
졸업후 검사 임관, 탄탄대로 보장 불구
생활고에 자식과 죽으려한 여성 사건 맡아
살인미수 기소 거부… ‘이리와 같아’ 사직
메이지법률대학을 졸업한 후세는 우츠노미야구재판소 검사대리에 임명된다. 법조인으로서 탄탄대로가 펼쳐진 셈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검사라는 직책은 마치 이리와 같다’는 내용이 담긴 ‘사직의 글’을 발표하며 일제 사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사법관의 길을 포기했다. 오랜 생활고에 자식 3명과 동반자살을 하려다 마음을 고쳐먹고 자수한 여성에 대해 살인미수 혐의를 적용해 기소하라는 상관의 지시를 거부한 것이다.2
후세가 발표한 ‘사직의 글’에는 ‘나를 언제나 감싸는 사회정책으로서의 겸애주의’라는 표현이 담겼다. 후세가 어린 시절부터 접했던 묵자의 ‘겸애사상’에서 나온 표현이다. 겸애주의는 가족, 사회, 국가의 평화를 목표로 남을 사랑하기를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는 보편적 사랑이며, 서로를 이롭게 해주는 공리주의적 사랑을 말한다. 변호사로서의 길을 밟기로 한 후세는 평생을 겸애사상에 기초한 삶을 살았다.
■ 조선인의 영원한 친구, ‘우리의 변호사’
‘자유법조단’ 꾸려 조선인 학살 등 파헤쳐
지금도 1천여명 인권·환경 분야 활약중
일제, 사회주의 탄압에 ‘치안유지법’ 활용
변호 활동중 옥고… 전향 거부 지조 지켜
후세가 본격적으로 조선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1919년이다.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도쿄 유학생들을 변호한 이후, 그는 개인 잡지 ‘법정에서 사회로’에 ‘자기혁명의 고백’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한다. 자신의 주요 활동 장소를 법정이 아닌 사회로 옮기겠다며 ‘조선인과 대만인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사건’ 등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건만 변호하겠다고 밝혔다. 그의 나이 40세, 한창 변호사 활동으로 부와 명예를 드높이고 있던 시기였다.
1921년 후세는 고베의 미츠비시·가와사키 조선소 쟁의 지원을 계기로 야마사키 게시야(1877~1954)와 함께 ‘자유법조단’을 꾸렸다. 이후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해서도 후세가 이끈 자유법조단은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데 앞장섰다. 지금도 1천여명의 변호사가 자유법조단에서 활동하며 인권, 환경 등의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후세는 일제의 ‘치안유지법’으로 대표되는 제국주의, 천황제 체제와 맞섰다. 관동대지진 이후 혼란을 막기 위해 공포된 ‘긴급칙령’을 전신으로 한 치안유지법은 ‘국체의 변혁’과 사유재산제도의 부인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제는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행동을 제국주의의 존립을 위협하는 행위로 보고 모든 독립운동을 처벌하는 데에 치안유지법을 적용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치안유지법이 적용돼 기소된 사건은 ‘조선공산당 사건’이었다. 신의주 한 음식점에서 벌어진 단순 폭행 사건에서, 신만청년회원 김경서(1902~?)의 집에서 ‘고려공산청년회’ 비밀문서가 발견되면서 이는 대규모 비밀결사사건으로 전환됐다. 1926년 순종 서거 이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맡은 권오설(1837~1930)을 중심으로 6·10 만세운동을 벌이려 했다는 사실도 드러나며, 두 사건은 병합돼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재판이 이뤄지게 된다. 이때 공판에만 101명이 회부된 대형 사건이었다. 조선변호사협회를 중심으로 이인, 김병로, 허헌 등 유명 변호사와 후세 다츠지, 후루야 사다오(1889~1976)가 변호인단에 합세했다.
이 사건은 첫 체포부터 공판이 열리기까지 약 22개월이나 걸렸다. 공판 역시 총 48차례를 거쳐 기소된 지 5개월 만에 판결이 내려졌다.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 옥고를 치르다 사망하는 피고인까지 나오면서, 공판에 참여한 후세는 신속 재판과 공개 금지 해제를 요구했다.
후세는 바쁜 일정 탓에 1주일 동안만 조선에 있을 수 있었지만, 조선에 머무르는 동안 구속된 피고인들을 모두 면회했다. 이를 통해 피고인들이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보석을 신청해 보석 허가를 얻어낼 수 있었다. 또 보석된 피고인들로부터 경찰 신문 과정에서 모진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3
■ 일제 사법부의 ‘치안유지법’과 맞서 싸우다
일제의 치안유지법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 공산주의, 사회주의 세력에게도 칼날을 겨눴다. 후세도 치안유지법의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1928년 일제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본공산당과 노동농민당 1천600여명을 체포했으며, 다음 해에도 5천여명을 체포했다. 후세는 이들을 변호하기 위해 ‘해방운동희생자구원회’를 결성해 전국의 재판소를 오가며 이들을 변호했다. 후세는 도쿄에 있는 기소 대상자 전원을 한꺼번에 재판하라고 요구하는 단일공판 요청서를 법원에 제출했는데, 이 과정에서 오사카에서 공판을 받던 피고인들도 단일공판을 요구하며 재판장을 뛰어나가는 일이 벌어졌다. 사법부는 이를 후세가 선동했다고 보고, 그를 도쿄공소원 징계재판소에 기소한다.
그 와중에 후세가 발간하는 ‘법률전선’의 ‘공산당사건법정투쟁 특집호’가 안녕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는 이유로 신문지법 위반 혐의로도 기소됐다. 이 사건으로 후세는 변호사직을 잃게 된다. 이어 일본노동변호사단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면서, 후세도 함께 체포됐다. 이때 후세의 동료 상당수가 전향했지만, 다시 수감된 후세는 끝까지 양심을 지켰다. 후세는 1940년 7월 특별 사면 대상자에 포함돼 출옥한다.
■ 일본 암흑기 속 빛난 인물, 후세 다츠지
도쿄에 묘지 “전후 80년 올해 발길 늘어”
‘공산주의자 오해’ 묘비 훼손 수난에도
평화정신 기리는 이들 공적 알리기 노력
일본인들은 후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지난 9월11일 취재팀이 찾은 도쿄 이케부구로 ‘일련정종 영취산 조자이시’라는 조용하고 정갈한 사찰. 이곳에는 후세와 아내의 묘지가 세워져 있었다. “후세 다츠지의 묘지를 보러 왔다”는 말에 앳된 얼굴의 스님이 사찰 뒤에 묘원을 안내했다. 그는 “올해는 일본이 벌인 전쟁이 끝난 지 80주년을 맞아서 그런지 예년보다 더 많은 시민이 후세의 묘소를 방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에게 후세는 다른 국가를 식민지로 삼아 약탈과 착취를 일삼던 시기에도 일본 시민사회의 양심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후세의 고향 이시노마키에 있는 시립박물관에서는 후세 다츠지에 대한 상설 전시가 열리고 있다. 6개월마다 전시 주제가 바뀌는데, 취재팀이 방문한 9월13일에는 ‘후세 다츠지와 전쟁’을 주제로 한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후세의 시와 일기, 성명문에는 전쟁을 우려하고 평화를 바라는 그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후세가 사망한 9월13일을 전후로 매년 그를 기리는 현창식도 열리고 있다. 지난 2018년 후세 사망 65주년을 기념해 후세의 후손들과 후세의 정신을 기리는 이들이 모여 작은 연극을 준비했었다. 작은 극장에 관객 400여명이 모일 정도로 후세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을 알게된 이들은 이듬해 현창회를 조직해 후세의 정신을 기리기로 했다. 현창식이 열린 지난 9월13일 만난 ‘후세 다츠지를 현창하는 모임’의 산조 노부유키 사무국장은 취재팀을 반갑게 맞이했다.
“후세는 그저 유명한 법조인이 아닙니다. 일본의 암흑기에도 양심에 따라 행동하며 모든 사람을 사랑했던 인물이죠. 법조계에선 후세가 어떤 사건들을 주로 변호했는지, 그리고 그의 사상들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시민들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그가 공산주의자라고 오해하며 그의 행적을 지우려는 사람도 많아요.”
후세는 여전히 우익 세력으로부터 공격받고 있으며, 그의 묘비를 훼손하려는 사건도 있었다. 후세 다츠지를 현창하는 모임은 후세의 일생이나 사상과 공적을 일본 사회에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산조 노부유키 사무국장은 후세의 정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일본 사회에는 외국인을 배척하고 전쟁에 동조하는 세력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국경을 초월해 모두를 나처럼 사랑하는 후세의 마음이 지금 사회엔 꼭 필요합니다.”
※ 위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출처]
1) 후세 간지, ‘나는 양심을 믿는다’, 현암사, 2) 후세 다츠지, ‘법정으로부터 사회로’, 1920 3) 전병무, ‘후세 다츠지 평전’, 역사공간, 2022
도쿄/정선아기자 sun@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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