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위대한 정신문화 유산 걷기중에 탄생
스마트폰 탈출, 디지털 디톡스 시간 삼아야
마음의 여백 속 뜻밖의 통찰 떠오를수도
걷기 열풍이 도도하다. 걷기운동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밀폐와 밀집, 밀접을 회피하면서 야외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최적의 운동으로 선택되면서 본격적 국민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걷기운동은 대표적 유산소 운동으로 심혈관계 건강을 증진하고 만성질환의 위험을 낮추는 등 신체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기분전환이나 우울감 완화, 수면의 질 개선 효과는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걷기 운동은 뇌에 산소와 혈류 공급을 원활히 하면서 인지기능과 창의성이 향상된다는 보고도 있다.
이 걷기운동이 각종 문화 프로그램과 결합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한국도서관협회가 주관하는 ‘길 위의 인문학’ 사업이 대표적인데 강연과 탐방, 후속 모임으로 이어지는 프로그램이 많다. 정조의 능행길이나 영남대로 걷기와 같은 행사도 있고 코리아둘레길, 소백산맥길과 같은 옛길을 복원한 둘레길도 있다. 경상북도의 청정지대인 청송, 영양, 봉화와 강원도 영월을 잇는 외씨버선길과 같은 장장 250㎞의 둘레길도 있다.
그런데 걷기나 산책은 뿌리 깊은 인류의 문화이다. 위대한 정신문화 유산 가운데 상당수가 걷기나 산책의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다. 석가모니나 공자의 사상도 스승과 제자들이 세상을 주유(周遊)하며 공부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도 철학학교에 특별히 설치된 산책로인 페리파토스에서 제자들과의 문답을 통해 깊어졌다. 장자도 자유로운 거닐기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소요(逍遙)의 경지에 도달하려 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남긴 수 백편의 유산기(遊山記) 자연 산책 기록 문학이며 가사문학 작품들도 산책 에세이라 할 수 있다. 생태주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은 미국 수필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다. 산책이 삶의 방식으로까지 고양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문학적 성과이다. 독일의 철학자 벤야민은 산책을 통해 19세기 파리와 자본주의 문화의 변화를 읽어냈다. 그는 ‘플라네르’(Flaneur)라는 산책자의 개념을 구성하여 그의 시선으로 파리의 거리를 산책하며 아케이드 도시의 군중을 관찰하였으며,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거대한 근대 문화 연구의 성과를 낳았다.
산책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는 걷기를 통해 일상에 지친 심신을 치유하고 건강을 증진시키려는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스마트폰과 컴퓨터 화면을 보며 일상을 보내면서 극심한 디지털 피로를 겪고 있다. 산책을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부터 탈출하는 디지털 디톡스의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한국의 여행 습관에서 고쳐야 할 점은 ‘의욕 과잉’으로 촉박한 일정을 짠다는 것이다. 많은 곳을 봐야겠다는 욕심 때문에 오히려 이동시간은 늘어나고 목적지에 머무를 시간이 없어 ‘찍고 오기’식 여행이 되고 만다.
산책 도중 떠오르는 생각은 음성메모나 노트에 기록하되 사진이나 동영상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디지털 메모리가 아니라 본인의 감각과 기억에다 남겨야 한다. 산책의 목표는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느끼는 것이다.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촉각을 사용하여 발이 땅에 닿은 느낌, 피부에 스치는 공기의 온도와 습도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코로 스미는 풀꽃이나 나무의 향기, 바닷물과 갯내음 등 오감에 집중하는 명상의 산책을 즐겨야 한다. 그러자면 일정이 여유로워야 마음의 여백도 준비해야 한다. 이 여유와 여백 속에서 뜻밖의 통찰이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다.
산책 인문학 프로그램을 현장에서도 ‘의욕과잉’의 폐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강사들은 산책 시간 내내 준비해온 역사나 지리 정보를 전달하기에 바쁘다. 프로그램 참여자들은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산책의 주인공이다. 정보전달은 최소화하고 참여 주체가 자율적으로 자연이나 산책 현장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산책이란 말 그대로 목적 없이 여유롭게 이리저리 거닐기이다.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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