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의 세계 공존하는 예술

자신을 구원하는 건 각광이 아닌

스스로의 믿음이라고 말해주고파

이 밤, 한줌의 평안 속 눈 붙이길

이원석 시인
이원석 시인

얼마 전 친구로부터, 글을 쓸 때 압박감이 너무 커서 상담을 신청한 청년이 있는데 도움을 줄 수 있겠냐는 요청을 받았다. 친구가 내게 전한 것은, 작가가 되기 위해 문학창작을 해나가는데 있어 외로움과 고립감이 크다는 간단한 정보였지만 그 마음을 모두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모두라고는 할 수 없을 테지만 적어도 내가 겪어본 일이기에 그 이야기가 남의 얘기처럼 들리지 않았다. 작가라는 직업은, 겉으로 보기엔 꽤 매력적이고 행복한 일이다. 독자들의 박수 갈채를 받고 자신의 이름이 인쇄된 책을 만들 수 있다. 그건 빛의 이야기다.

하지만 어둠의 이야기도 있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는 것은 경제적인 여유와 즐거움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다. 자신이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삶의 빛나는 순간을 홀로 자신의 방에서 견뎌야 하는 일이다. 그 순간을 지켜보고 증명해줄 그 어떤 증인도 없이 고독 속에서 버텨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일이라는 것은 스트레스 받지 말고 즐기면서 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바닥엔 Fun도 Easy도 없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텍스트 힙스터들의 소식이 창가로 날아들지만 그건 행운의 별이 선택한 소수의 이야기다. 대다수는 스스로가 만든 자기만의 방에서, 묵묵히 대중의 외면을 견디며 써야 한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작은 빛을 비추자고, 비추고 있다고, 비출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외부의 각광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수년 동안 트위터를 하며 많은 창작 예술인들의 좌절과 고통, 질투와 동경, 불안과 불면 등을 봐왔다. 지금의 내 동료 중 많은 수가 지난날의 트위터 한탄러였다. 나 또한 그랬다. 밤과 새벽마다 세상을 향해 내 불안과 참회와 저주와 축복을 발사했다.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 SNS에서 고통의 비명 글을 올리면 무신론자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8)하며 달려 나가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기도한다. ‘예술은 빛과 어둠의 세계가 공존합니다. 여러분은 빛의 세계에 있으세요 빛의 아름다움을 쓰세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자신이 어둠에 삼켜지지 않을 사람만 어둠에 발을 들이세요. 어둠은 어두워지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불을 밝히기 위해 가는 겁니다. 빛으로 얻을 수 없는 뜨거움, 그걸 선명히 보고 느끼기 위해 갑니다. 하지만 거기서 불을 피우지 못하면 어둠에 잡아먹히고 맙니다. 뜨거움으로 타올라야 합니다. 내 살이 타는 냄새를 맡으면서 분투해야 합니다. 그게 삶과 예술의 본류이자 본질이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빛의 세계에 있으세요. 어둠을 우습게 보지 마세요. 많은 선배들이,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쟁쟁한 예술가들이 어둠 속으로 떠내려갔습니다. 하지만 어둠에 쓰러진 이들에게 빛을 비추고 우리의 삶이 결코 어둠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어둠으로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불타야 합니다’.

매일 밤 내가 함께 분노하고 울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비명 같은 글을 공유하는 그들은 한 개인이 아니라 실체를 볼 수 없는 인터넷상의 어떤 흐름이기도 하고 또다시 생각하면 현재형으로 함께 고통받으며 실존하는 나의 동료이기도 하다. 그들은 나의 과거이며 현재이며 미래다. 그들은 내가 내 문학과 시의 지평을 확보하려고 아닌 밤 허공에 홀로 홍두깨를 휘두르며 SNS에 한탄 글을 쏟아내던 시절을 관통 중인 나의 과거이기도 하고 나의 다음 세대로서 내가 끝내 가보지 못할 시간의 언덕 너머를 밟게 될 미래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주어진 고통과 불안에 같이 눈물을 흘리고, 함께 떨고 있는 나의 심장을 건네며 그들이 이 밤도 한 줌의 사랑, 한 줌의 평안 속에서 잠시 눈 붙이기를 소망해본다.

/이원석 시인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