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아들아, 북녘 하늘만 하염없이…
북쪽 바라보면 개성 송악산 시야에
고려 강도시기에 민가와 관청 많아
1907년 항일 의병 주둔지 되기도
일제, 정상에 신사 짓고 참배 강요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중심가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북쪽은 북산, 남쪽은 남산이 서로 마주 보는 형태로 막아주며, 서쪽은 고려산 자락이 한 발짝 떨어져 어깨를 두르고 서 있고, 동쪽에서는 견자산이 허리를 바짝 감싸고 있다. 견자산과 남산의 빈틈을 남문 성곽이, 견자산과 북산 사이를 동문이, 북산과 남산의 틈을 서문 성곽이 지키고 섰다. 강화읍 북산은 고려가 천도(遷都)한 뒤로 개성에서 도읍을 지키던 산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송악산이라 칭해왔다.
강화읍내를 둘러싼 산 중에 견자산은 규모 면에서는 가장 작을지라도 강화읍의 성지(聖地)로 기능하고 있다. 해발 60m밖에 안 되는 동산에 불과해 보이지만 호국영령에 참배하는 기념일에는 다들 견자산에 모인다. 정상에는 국가보훈부 지정 현충시설인 현충탑이 있다. 6·25전쟁 중 전사한 강화 출신 전몰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탑 뒤편에는 전몰군경 1천33명(국군 735명, 특공대 18명, 경찰관 36명, 유격군 244명)의 이름을 새긴 담을 둘렀다.
견자산(見子山)이라는 이름은 강화도가 고려의 도읍지이던 시절의 얘기에서 시작된다. 고려 왕 고종이 1253년과 1259년에 왕자를 몽골에 볼모 격으로 보낸 적이 있다. 왕은 그 당시 아들이 그리울 때마다 이 산에 올라 개성 쪽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왕자를 생각했다고 해서 견자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얘기가 전한다.
요새도 맑은 날 견자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면 비록 나뭇가지가 시야를 가리기는 하지만 개성 송악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고려 때는 미세먼지 같은 대기오염 물질도 없었으니 더 가깝게 볼 수 있었으리라. 견자산에서 바라보는 송악산 풍경은 고려 왕 고종이 실제로 견자산에 올라 몽골에 볼모로 들여보낸 아들을 그리워하고 개성의 옛 영화를 생각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고려 강도(江都) 시기 견자산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고, 관청 건물도 여럿 있었던 듯하다. 최고 실권자 최우의 대저택인 진양부(晉陽府)도 견자산 자락에 있었다. 최우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최항이 견자산 진양부에 옮겨 살았다.
1245년 3월에는 견자산 북쪽 마을에 불이 나 민가 800여 호가 불탔으며 이로 인해 80여 명이 숨졌다는 내용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기록돼 있다. ‘고려사’는 이 불로 연경궁(延慶宮)은 물론 법왕사(法王寺), 어장고(御醬庫, 왕이 먹을 장류를 보관하던 곳), 대상부(大常府, 왕실의 제사를 주관하던 기관), 수양도감(輸養都監,궁중 필요 물품 조달 기관)이 연소하였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들 국가기관이 견자산 주변에 몰려 있었다는 얘기다.
견자산은 1907년 항일 의병들의 주둔지가 되기도 했다. 독립기념관은 견자산을 강화진위분견대 대원들이 의병을 일으킨 곳으로 소개하고 있다. 독립기념관은 항일독립운동 사적지와 6·25전쟁 국가수호 사적지를 지정해 놓고 있는데 인천에는 총 45개소가 있다. 그중 절반이 넘는 26개소가 강화에 몰려 있다. 견자산이 그중 한 곳인데 일제는 견자산 정상에 신사(神社)를 지어 참배를 강요하기도 했다. 일제의 견자산 신사는 해방과 함께 헐렸다고 한다.
견자산에서의 전몰자 추모는 6·25전쟁을 넘어서야 한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과 조선시대의 여러 차례 병란, 그리고 고려시대 대몽항쟁 시기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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