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가장 정확한 언어로 표현해야 하고 자기 나라 표준어를 구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을 중심으로 정체 모를 언어들이 떠도는데 이런 말들은 조만간 소멸할 것이고 표준어는 도도하게 남을 것입니다. 배우는 어떤 지역이나 계층이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발성해야 합니다. (경인일보 2018년 4월25일자 15면 ‘인터뷰 공감’ 중에서)
국민배우 이순재의 연기 철학은 ‘화술’에서 비롯된다. 배고픈 연극배우 시절, 사전을 펴놓고 장음과 단음을 일일이 찾아가며 공부했단다. 연필 자국 가득한 대본이 노력과 열정을 증명한다. ‘배우는 그 나라 언어의 대변자’, 연기 인생을 지탱해 준 소신이다. 그가 2012년 가천대 연기예술과 석좌교수로 처음 맡은 강의도 ‘화술훈련’이다. 우리말의 정형을 아름답게 구사하는 것이 의무라고 역설해왔다.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단단한 발성은 무대를 채우고도 남는다. 배우 이덕화도 부러워한 목소리다. 유행어 “부탁해요”가 이순재의 목소리를 흉내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NG, 힘들다, 적당히가 없는 ‘3무(無) 철학’은 그의 삶을 대변한다. 기억력은 자존심이다. 현장에서 ‘민폐’는 사절이다. 기억력 유지를 위해 미국 역대 대통령 이름과 순서를 줄줄 암기했다. 1시간 먼저 현장에 도착하는 성실함으로 일터의 가치를 실현했다. ‘직진 순재’는 엄격한 선배이자 멘토였다. 한 배우의 중도 하차 논란에 “배우는 죽는 한이 있어도 현장을 지켜야 한다”고 독려했다. 지각하는 후배 연기자에게 성실한 자세를 당부했다.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들에게는 “스스로 자퇴할 사람이 많다”고 뼈 있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쪽대본·회치기 대본, 고액 출연료 쏠림 등 업계의 관행과 상업주의에도 거침없이 목소리를 냈다.
‘영원한 현역’ 국민배우 이순재가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했다. 70년 간 드라마 175편·영화 150편·연극 100여편에서 폭넓은 캐릭터를 선보였다.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속 가부장적 대발이 아버지부터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순재, 예능 ‘꽃보다 할배’ 직진순재까지 평생 도전과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순재는 연기를 완성할 수 없는 보석에 비유하며, 꾸준히 세공하고 연마했다. 연기는 완벽하게 빛났고, 시대의 자존감이자 얼굴이 됐다. 이순재는 한국 대중문화예술의 한 장르였다.
/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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