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세 노모, 30년 넘게 살뜰하게 가꿔온 공간

다른 방법 없는지 도돌이표 같은 질문 남아

곧 다가올 미래, 나는 어떤 선택지를 가질까

이충환 언론학 박사·객원논설위원
이충환 언론학 박사·객원논설위원

왜 그렇게 미적댔는지 모르겠다. 다른 일 같았으면 벌써 해치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병원에 입원한 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두 번의 입·퇴원과 한 번의 짧았던 가정형 요양원 생활을 거친 다음 지금의 요양원으로 옮긴 지도 열 달이나 됐다. 지내던 집으로 다시 돌아오시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집을 정리하지 못한 채 뭉그적거리기만 했다.

마음을 다잡고 어머니의 세간붙이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건 지난 추석 무렵부터였다. 아내와 둘이서 서너 번 손대면 남길 것과 버릴 것들이 가려지겠거니 했는데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질 않았다. 이걸 버리자니 이런 생각이 나고, 저걸 버리자니 저런 생각이 들어서 도대체 속도가 붙질 않았다.

결국 당신이 아끼시던 옷 몇 벌과 오래된 사진들, 그리고 어릴 적 기억을 온전히 담고 있는 빈티지 소품 몇 개만 내 집으로 가져오곤 나머지는 전문업체에 맡겨 처분하기로 했다. 손바닥만 한 임대아파트를 원래의 모습대로 되돌려놓는데 점심도 거르고 꼬박 한나절이 걸렸다. 아무렴 95세 노모가 30년 넘게 살뜰하게 가꾸며 살아온 공간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인생 고락을 함께 한 시간이 먼지처럼 뽀얗게 내려앉아 있는 곳이다. 떼어내어야 할 삶의 흔적과 기억이 집 안 구석구석 그토록 켜켜이 쌓여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집을 비운 사실을 말씀드렸다. 사고와 기억의 회로가 엉클어진 상태에서도 수고했다는 말을 잊지 않으셨다. 그런데 미련까지 버리진 못한다. “나는 이제 죽을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지?” 집은 비웠으나 도돌이표 같은 질문이 남았다.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나 스스로 묻고 또 물었던 터다. 다른 길은 없나? 다른 방법은 없을까? 요양원을 택하고, 집을 비우고, 이 모든 게 정말 올바른 결정일까?

2010년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100인’, 2015년 영국 ‘프로스펙트’가 선정한 ‘세계적인 사상가 50인’에 각각 이름을 올린 미국의 외과 의사 아툴 가완디도 같은 질문을 한다. 국내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된 2014년도의 저서 ‘Being Mortal’은 현대 의학의 발전과 인간 수명의 연장, 그로 인한 고령기의 장기화로 요양원이라는 집단시설 안에서 자율성과 독립성을 상실한 채 삶의 마지막 부분을 보내야 하는 노인들의 사례를 다룬다.

가완디의 평가는 ‘의학적으로 고안된 답이고, 안전하도록 설계된 삶이지만 당사자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도 없는 텅 빈 삶’이다. 이것이 현대 사회가 노인 문제에 대처해온 변함없는 패턴이며, 삶의 마지막 단계에 관해 생각지 않으려는 태도로 일관하는 사회가 낳은 결과라고 지적한다.

변화를 위한 노력이 없는 건 아니다. 집과 요양원의 특장점을 결합한 ‘어시스티드 리빙’(assisted living)은 1980년대 이후 요양원의 대안으로서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곧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다. 반려동물과 식물, 그리고 직원 자녀를 노인들에게 맡길 수 있는 탁아시설과 방과후교실을 갖춘 ‘에덴 얼터너티브’(Eden Alternative)는 성공 사례다. 이 프로그램 기획자인 하버드 의대 출신의 젊은 의사가 새로 고안한 ‘그린하우스’(Green House)는 12명 이하의 노인들이 공동생활을 하되 각자의 자율성이 최대한 보장되도록 설계됐다. 책이 출판된 그해 벌써 25개 주에서 150개가 넘는 시설이 만들어졌다. 노인을 단순히 환자로 보지 않고, 삶의 주체로 존중하며, 돌봄 환경을 가정처럼 따뜻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물론 기존 요양원보다 비용이 더 들지도 않는다.

2019년 12월 3천595개였던 우리나라의 등록 요양원 수가 5년만에 4천640개로 늘어났다. 입소정원도 따라서 확대됐다. 한동안 추세는 이어질 것이다. 이미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 이상인 초고령 사회다.

내게도 곧 다가올 미래, 나는 어떤 선택지를 가질 수 있을까. 과연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할까. 혹시나 그때까지도 나의 이 두려운 질문이 계속되고 있진 않을까.

/이충환 언론학 박사·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