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부르고, 아이돌 응원봉 들고

집회문화 바꾸며 광장의 주역으로

“약자에게 부조리는 더 가까운 문제”

소속감 없는 깃발, 개인의 집합 부각

‘성소수자·청소년 존중’ 광장의 규칙

약자 스스로 바꿔놓은 다양성의 축제

불참 시민들, 선결제로 연대 문화도

1년 후 지금 유권자 존재감 어디로

지난해 12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날,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민들이 형형색색의 응원봉을 흔들고 있다. 2024.12.14 /경인일보DB
지난해 12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날,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민들이 형형색색의 응원봉을 흔들고 있다. 2024.12.14 /경인일보DB

지난해 12·3 비상계엄 선포 직후부터 이듬해인 올해 4월 4일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을 이끌어내기까지 대한민국 민주주의 회복을 외친 ‘광장’의 최전선에는 2030세대 여성들이 있었다. 평소 좋아하는 K-팝 아이돌 응원봉을 손에 쥐고 광장으로 나선 여성들은 새로운 집회 문화를 선도하며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이끄는 한 주체로 떠올랐다.

지난 겨울, 불법 비상계엄에 저항하기 위해 시민들이 모인 광장은 성별과 연령, 종교, 인종 등 ‘다양성’이 공존하는 그야말로 축제와도 같은 현장이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2030 여성들의 활발한 참여였다.

인하대에 재학 중인 이서영(의학과·23학번)씨는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 노동자 등은 사회의 부조리함을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윤 대통령 탄핵 심판이 진행되던 올해 2월, 인하대 교정에서 퇴진 집회를 주도한 그는 “특히 여성을 향한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 등이 2030 여성들을 광장으로 이끈 것 같다”고 했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불빛들이야말로 다양성의 가치를 존중하는 민주주의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윤석열 즉각 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로 열린 촛불집회에 이색 단체의 이색적인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다.  2024.12.14 /연합뉴스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윤석열 즉각 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로 열린 촛불집회에 이색 단체의 이색적인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다. 2024.12.14 /연합뉴스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 ‘강아지 발냄새 연구회’ 등 기상천외한 모임의 이름을 적은 깃발들이 매서운 바람을 가르며 나부꼈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 때 일제히 촛불을 든 시민들은 이번엔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응원봉을 손에 쥐었다.

유머와 개성을 담은 깃발, 제각각 다른 빛을 내는 응원봉은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사람들이 단체나 정당에 소속된 집단이 아니라 오로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나온 개인들의 집합이라는 것을 실감케 했다.

‘민중가요’ 일색이던 광장에는 K-팝이 울려 퍼지기도 했다. 1982년 발매된 윤수일의 ‘아파트’에 익숙한 기성세대도 당시 음원 차트 상위권을 휩쓴 아이돌 가수 로제의 ‘아파트’를 젊은 세대와 함께 부르며 춤을 췄다.

직장인 김세현(31)씨는 “비상계엄이라는 위험천만한 상황을 겨우 넘긴 상황이었지만, ‘우리가 나서면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즐겁게 집회에 참여했다”며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불빛들이야말로 다양성의 가치를 존중하는 민주주의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인천시 미추홀구 농수산물시장사거리에서 열린 내란주범 윤석열 탄핵 인천시민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은원봉과 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 2024.12.9 /경인일보DB
인천시 미추홀구 농수산물시장사거리에서 열린 내란주범 윤석열 탄핵 인천시민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은원봉과 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 2024.12.9 /경인일보DB

광장에는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했다. 청소년에게 하대하는 말을 하지 않고, 자유발언을 할 때에는 차별이나 혐오 발언을 하지 말자는 규칙이 생겼다. 시민들은 성소수자의 커밍아웃을 환영하고, 윤 정부로부터 탄압받은 노동자의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허정원(동국대 사회학과·24학번)씨는 “광장에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타인의 삶을 깊게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었다”고 했다.

‘행동하는성소수자연대’에서 활동하는 지오(활동명)씨는 “광장에서 만난 시민들은 성소수자를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연대하는 시민으로 대했다”면서 “계엄 사태와 탄핵 국면 이후, 혐오와 차별에 맞서 싸우겠다며 우리 단체에 새로 가입하는 시민들도 많아졌다”고 했다.

매서운 칼바람에 시민들은 핫팩을 건네고, 함박눈이 내린 날에는 서로의 몸을 은박 담요로 꽁꽁 싸매주며 초콜릿 ‘키세스’ 동지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 집회에 참가하지 못하는 시민들은 주변 카페나 음식점에 일정 금액을 선결제한 뒤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알리는 방식으로 힘을 보탰다.

지난해 12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날,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민들이 형형색색의 응원봉을 흔들고 있다. 2024.12.14 /경인일보DB
지난해 12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날,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민들이 형형색색의 응원봉을 흔들고 있다. 2024.12.14 /경인일보DB

이러한 ‘선결제 문화’는 온정을 나누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12월 전남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지난 3월 영남 일대 대형 산불 등이 발생했을 당시 시민들은 인근 음식점 등에 선결제를 해 유가족과 자원봉사자, 소방대원을 도왔다.

우리 사회의 한 주체로서 존재감을 드러낸 여성들은 ‘그 다음’을 요구하고 있다. 김아름(25)씨는 “많은 여성들이 광장에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싸웠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정치 유권자로서 여성의 존재감은 희미하다”며 “여성과 성평등 의제가 정치권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길 바란다”고 했다.

/정선아·고건기자 su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