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딤돌 인문학 20년만에 최초
정부 예산으로 프로그램 진행
교도소 등 전국 53개시설 강좌
팬지문학상 내일 강원서 시상
중학생 때였을까. 머리를 박박 미는 것도, 이발은 이발인지라 달에 한 번은 동네 이발소에 드나들곤 했다. 이발소 의자에 앉아 ‘바리깡’으로 경부선과 호남선을 낼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곤 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눈에 들어오는 그림이 있었다. 여느 이발소에 가도 같은 그림이 걸려 있었다. 어미돼지의 젖꼭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잠들어 있는 새끼돼지들 그림 말이다. 그림 옆에는 또 어김없이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그림이야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것인 줄 단박에 알았지만, 그 옆의 문구는 도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삶이 무슨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사기꾼도 아닐진대 맨날 누굴 속인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던 그 문구가 어느새 머릿속에 각인됐었나 보다. 이러저러한 삶의 국면마다 스스로 써먹기도 했고, 그 말에 당하기도 했다. 시험을 망친 나를 골려 먹는 친구의 입에서도 그 말이 나왔고, 엄마한테 뒤지게 야단맞고 잔뜩 심통이 났을 땐 누나가 조용히 다가와 어깨를 툭툭 치며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으며 자라났다.
세상에는 나처럼 어리석을 만큼 낙천적인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속고. 결국 삶이라는 놈에게 속아서 깊은 가슴앓이를 하거나 절망감에 휩싸인 채 자포자기하고 자신을 학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왔다. 얼추 20년이 넘었다. 거리의 삶을 사는 노숙인과 한때의 실수로 영어의 몸이 된 사람들이다.
올해는 가히 기념비적인 한해였다. 노숙인 인문학이 시작된 지 20년 만에 최초로 정부예산으로 노숙인, 재소자, 저소득주민을 위한 인문학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디딤돌 인문학(한국형 클레멘트코스)이 그것이다. 전국의 교도소와 구치소 16곳, 지역자활센터 19곳, 노숙인시설 18곳, 총 53개 시설에서 동시에 인문강좌가 진행되었다. 그 힘겨운 일을 해낸 곳이 바로 인문공동체 책고집이다.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돈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필자가 20여 년 동안 그들과 줄기차게 교류해 왔고 인문학 강의의 의미와 성과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온 결과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예산을 세우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했다.
디딤돌 인문학은 단지 강의만 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성남 안나의집(노숙인시설)에서는 배우 손지나씨와 연극연출가 김현정씨가 출동해 연극학교를 운영했다.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이 모여 있는 아가페의집과 춘천시립복지원, 강릉시립복지원, 이리자선원에서는 그림그리기와 자기 마음 들여다보기 수업이 진행됐다. 저 멀리 해남교도소와 진주교도소, 통영구치소, 강릉교도소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강사들이 출동해 ‘언젠가 우리 곁으로 돌아올 미래의 이웃’인 수용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용기와 변화의 의지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다양하고 풍요로운 강좌를 진행했지만 정작 디딤돌 인문학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다. 팬지문학상이다. 26개 시설에서 288편의 시와 산문과 편지글 등이 접수됐다. 그중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에 해당하는 대상은 시흥 베다니마을(노숙인시설)에서 생활하는 강진민씨의 산문 ‘창백한 아이’에게 돌아갔다. 최우수상 4명과 우수상 15명에게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과 인문공동체 책고집 대표 명의의 상이 쥐어진다. 시상식은 9일 디딤돌 인문학 인문기행(강원도 고성) 중 진행한다.
다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되뇌어본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우울한 날에는 참아라/ 기쁜 날이 반드시 올 터이니// 마음은 미래에 사니/ 현재는 항상 어두운 법/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지나/ 지나간 것 모두 소중하리니’. 푸시킨 시선집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중에서.
/최준영 (사)인문공동체 책고집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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