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 가득 담긴 정화궁주의 청동수조

단군 세아들의 삼랑성 품은 사찰

60~70년전 ‘신식 결혼식장’이기도

대웅보전 용마루 청기와 ‘후대 色’

려말 이색, 대조루서 바다 응시

강화 전등사에는 평일, 휴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2025.12.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강화 전등사에는 평일, 휴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2025.12.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강화 전등사에는 평일, 휴일 할 것 없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년에 100만 명 정도 찾는다. 전등사는 세로로 움직이는 시간과 가로로 연결된 공간이 만나는 교차점이다. 그리하여, 전등사 경내는 온통 오랜 이야깃거리로 넘쳐난다.

최근 조계종이 유명 사찰에서 진행하는 남녀 소개팅 프로그램 ‘나는 절로’가 인기를 끌고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전등사였다. 전등사는 60~70년 전에도 젊은이들이 가정을 꾸리고 새출발하는 예식의 공간이었다. 강화지역 노인들은 전등사를 최초의 신식 결혼식장으로 기억한다. 1950년대 후반, 강화 사람들이 다들 신부 집에 가서 차양막을 치고 전통혼례를 올릴 때 전등사에서는 신랑은 양복을 입고 신부는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서양식 결혼식을 치렀다. 그때 전등사 결혼식 사진을 간직하고 있는 노인들이 강화에는 많다.

전등사는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를 이야기할 때, 그 5천년 내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야말로 유구한 사찰이다. 전등사를 품고 있는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의 성곽이니 가람의 터전으로 따지자면 우리나라 출발선에 가닿는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381년) 아도화상이 진종사(眞宗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라는 얘기가 된다.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정족산사고를 지켰으며,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 장군이 이곳에서 프랑스군을 패퇴시키기도 했다.

전등사는 고려시대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름부터가 그렇다. 전등사(傳燈寺)는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貞和宮主)로부터 옥등(玉燈)을 전해 받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옥등을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갔다고 한다.

비운의 여인인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 이야기가 서려 있는 청동수조. 2025.12.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비운의 여인인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 이야기가 서려 있는 청동수조. 2025.12.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충렬왕이 원나라 대장공주와 결혼하게 되면서 왕비 자리에서 밀려난 비운의 여인 정화궁주와 관련한 이야기를 전등사는 또 하나 간직하고 있다. 지름 112cm, 높이 72cm의 커다란 청동수조(靑銅水槽). 해방 이후 처음으로 발간된 ‘강화사’(1976년)는 이 청동수조가 정화궁주가 사용하던 것이라고 컬러사진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이 청동수조가 전등사 대웅보전 옆에 놓여 있는 것을 지금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청동수조는 대웅보전을 둘러 온 사람들이 처마 네 귀퉁이를 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을 올려다보느라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는 처지다. 17세기 대웅보전을 중수할 대목수 일을 맡은 도편수와 한 여인 사이에 얽힌 전설을 간직한 나부상이 시기상으로 훨씬 이른 고려 때의 청동수조 이야기를 앞도하고 있는 셈이다. 요새 이 청동수조에는 방문객들이 소원을 비는 의미로 던져 넣는 지폐와 동전만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정화궁주는 또 인기(印奇) 스님을 시켜 송나라에서 대장경 인쇄본을 가져다 전등사에 보관했다는 이야기와 자신이 기원하는 바를 나타내는 깃발인 원당(願幢)을 전등사에 내걸었다는 내용이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전등사 대웅보전 지붕 용마루 가운데에 3장의 기와가 청록색으로 칠해져 있다. 고려시대 청기와는 아니라고 한다. 2025.12.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전등사 대웅보전 지붕 용마루 가운데에 3장의 기와가 청록색으로 칠해져 있다. 고려시대 청기와는 아니라고 한다. 2025.12.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고려시대 강화 청기와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청색 유리기와인 청기와는 강도(江都) 시기 강화에서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1976년 ‘강화사’에 보면, “(청기와는) 고려조가 강화에서 개성으로 환도한 후 충렬왕 5년(1279)에 육연(六然) 스님이 만들어 일부는 정부에 바쳐 궁궐을 덮게 하고, 일부는 절 지붕에 덮었다는데 지금도 전등사를 비롯한 몇몇 절에 남아 있어 회고의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고 쓰여 있다.

전등사 대웅보전 지붕 꼭대기를 자세히 바라보면, 용마루 가운데에 기와 3장이 청록색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청기와는 고려시대 것이 아니라 최근의 것에 색깔만 칠한 것이라고 전등사 지불(指佛) 스님이 이야기했다.

전등사 지불 스님이 대웅보전 뒤편 창문을 가리키며 고려 건축양식을 보여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2025.12.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전등사 지불 스님이 대웅보전 뒤편 창문을 가리키며 고려 건축양식을 보여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2025.12.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지불 스님은 대웅보전 뒤편의 창문 양쪽 문 사이에 막대를 세워 넣은 것이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특이한 형태라고 설명했다.

고려 말 목은 이색이 이곳에 서서 바닷물 조류를 감상했다는 시를 남겼다고 한다. 2025.12.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고려 말 목은 이색이 이곳에 서서 바닷물 조류를 감상했다는 시를 남겼다고 한다. 2025.12.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대웅보전 앞에는 대조루(對潮樓)가 서 있는데, 고려 말 삼은 중의 한 명인 목은 이색(1328~1396)이 이곳에서 누각의 이름처럼 바닷물의 출렁임을 구경했다는 얘기도 전한다.

전등사를 내려오며, 800년 세월의 이야기가 담긴 정화궁주 청동수조가 그 국보급 내력만큼의 대접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