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평등·인권보장·국제평화…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은 ‘임정의 법통’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진션푸로 22호’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 첫 개회 추정
동포 대표 29인 ‘독립 이후의 나라’ 논의
‘왕조가 무너지고 일제를 타도한 자리에 어떤 국가를 세울 것인가’.
1919년 봄 상하이로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을 구상했다. 3·1운동이 남긴 과제는 일제에 맞선 저항에 더해 ‘어떤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그해 3월 전국을 뒤흔든 3·1운동은 단순한 만세 시위가 아니었다. 대한제국이라는 왕조 체제에서 민주공화정으로의 전환을 선언한 ‘혁명’이었다. 남녀노소, 신분의 귀천 없이 200만명이 참여한 이 거국적 봉기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안겼다. 이제 독립을 외치는 것을 넘어, 그 독립 이후 세워질 국가의 성격을 규정해야 했다.
한 달 뒤인 4월11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의 한 서양식 주택에서 지금의 제헌국회 격인 임시의정원이 열렸다. 열강의 조계지가 뒤엉킨 국제도시 상하이는 감시의 틈새였고, 그 좁은 틈에서 임시의정원 의원들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임시헌장을 제정했다. 3·1운동이 제기한 민주공화정의 열망을 헌법 문서로 구체화한 순간이었다.
100여년 전 상하이의 어느 좁은 회의실에서 작성된 이 문서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공화국의 헌정 질서를 지탱하는 뼈대가 됐다. 경인일보 광복·창간 80주년 특별기획 취재팀은 상하이의 윤봉길 의거 현장을 따라간 지난 다섯 번째 해외편에 이어, 이번 마지막 해외편에서 다시 상하이 임시헌장 탄생지와 임시정부 청사를 찾았다. 당시 그들이 꿈꾼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어떤 국가였을까.
■ 진션푸로 22호, 국호·헌법 가치가 태어난 곳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였던 진션푸로 22호. 현재는 일반 주거지이지만, 1919년 4월11일 임시의정원이 처음 개회된 장소로 추정된다. 당시 이곳에 주소지를 뒀던 인물이 바로 현순(1880~1968) 목사다. 3·1운동 직후 가장 먼저 상하이에 도착해 임시사무소 조직을 주도했고, 임시정부 초기에 외교·재정·연락 업무를 맡아 정부 운영을 실질적으로 떠받쳤던 인물이다.
그날 국내를 비롯해 미국·러시아·중국 등 해외 각국 동포 대표들로 구성된 29명은 현순의 집에 모여 독립 이후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를 핵심적으로 논의했다. 군주에게서 국민으로 주권을 옮겨오는 체제,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한 분립·통제 장치,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법으로 보장하는 방법을 놓고 밤새 문구를 조율했다. 국호 ‘대한민국’이 먼저 확정된 것도 민주공화제의 틀을 세우겠다는 합의가 선행됐기 때문이었다.
다만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이 건물이 임시정부의 ‘첫 청사’였는지, 혹은 단지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린 장소였는지에 대해 학계의 해석은 갈린다.1 그렇다고 해서 이 장소의 의미가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본질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공간들을 오가며 저마다의 국가 철학을 본격적으로 논의한 자리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독립을 선언하는 데 멈추지 않고, 국가의 성격과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 임시헌장, 독립을 넘어 ‘어떤 국가인가’ 묻다
홍익인간 사상 담은 ‘임시헌장’ 헌정 뿌리
여성 참정권, 영미권보다 앞서 ‘차별 타파’
외국인 생명·재산보호, 민족주의 경도 안돼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는 국가 운영의 세부 체계나 권한 배분을 정하기에 앞서 해방 이후 세워질 나라의 원리를 먼저 확정했다. 임시헌장은 선포문·선서문·정강·10개 조항으로 구성됐다. 전쟁 수행이나 외교 전략보다 해방 이후 어떤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가 논의의 중심이었다.2
첫 문장인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는 종교적 수사가 아니라, 홍익인간 사상을 헌정 언어로 전환한 표현으로 해석된다. 단일 민족의 이익을 넘어 존엄·공존·연대라는 보편적 가치를 국가의 기초에 두려는 시도였다. 이어지는 ‘정의가 폭력을 교화한다’는 문장은 폭력의 순환을 국가 원리로 삼지 않겠다는 선언이었고, 권력 행사조차 윤리·법치·책임 의무 위에 놓여야 한다는 원칙을 못 박았다.
조항에 담긴 방향성은 명확했다. ▲남녀·신분·빈부 차별 없는 모든 시민의 평등 보장 ▲언론·집회·결사·거주·통신의 기본권 보장 ▲여성의 선거권·피선거권 명시 ▲외국인의 생명·재산 보호.
여성 참정권을 명시한 시점은 영미권보다 앞섰다. 또 외국인의 생명·재산 보호 규정은 국적과 혈통으로 국민·비국민을 나누지 않는 인권 보장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다. 당시 일부 독립운동이 배타적 민족주의나 응징 서사를 강조하던 것과 달리, 임시헌장은 국제사회 속 상호보호·평화 체제를 전제한 공동체 구상을 선명히 담고 있었다. 선서문 또한 뜻깊다. ‘우리가 흘리는 피는 자손 만대의 자유와 복락을 위해 치르는 값’이라는 문장은 독립이 다음 세대의 삶을 위한 기반 마련임을 선언한 것이기도 하다.
임시헌장이 제시한 핵심은 세 가지였다. ‘평등한 시민’ ‘인권 보장’ ‘국제 평화 기여’. 이 원리는 훗날 임시정부의 여러 정치 체제 변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현행 헌법 전문에 명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을 구성하는 내용이 됐다.
■ 임정청사, 민주공화국 권력 원리 실험 무대
상하이 임정, 다양한 권력구조 실험의 장
현지 흥사단 지부 ‘3·1 혁명’ 보존 노력
저항 기록 너머 독립운동가들의 열띤 고민
우리는 ‘민주주의 어떻게 계승할까’ 숙제
진션푸로 22호에서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린 뒤 독립운동가들이 활동 기반을 옮긴 곳은 황푸구에 있는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다. 관광객들에게 가장 익숙한 장소이지만, 중요한 것은 건물의 외형보다 내부에서 어떤 구조를 만들고 어떤 갈등을 겪었는지다.
초기 임시정부는 의원내각제에 가까웠다. 임시의정원이 정부를 견제하는 구조였지만, 통합 과정에서 한성정부의 ‘집정관’ 제도가 들어오고, 이승만(1875~1965)이 이를 대통령 체제로 바꾸면서 권력이 집중됐다. 이승만은 상하이 체류 기간이 길지 않았고, 대부분 미국에서 외교 활동을 했다. 임기 제한이나 통제 장치가 없어 권한 남용 논란 또한 불거졌다. 더욱이 미국에 통치를 위임해 달라는 청원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용납 불가능한 사건으로 기록됐다. 결국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을 의결했다.3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1859~1925)은 언론인·역사학자였다. 그는 군사력이나 영토보다 ‘민족의 정신’(말·글·역사)을 국가 존립의 핵심으로 봤다.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없애고 국무령 제도를 도입해 ‘지도자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국민을 섬기는 존재’라는 구상을 추진했다. 명칭과 권한을 둘러싼 조정은 국무령·국무위원·주석제로 이어졌다. 단순한 직함 변경이 아니라, 독립 후 어떤 국가가 돼야 하느냐를 둘러싼 일종의 치열한 실험이었다.
도산 안창호(1878~1938)는 임시정부가 명목상 ‘정부’가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정부가 되도록 운영 체계와 기반을 정비한 핵심 인물이다. 1913년 미국에서 흥사단을 창설해 시민윤리와 교육을 조직화했고,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이동해 연통제 구축과 각 지역 인물 소집을 맡으며 임정이 실제로 기능하도록 기반을 마련했다.
임시정부청사 현장에 전시된 단체 사진들은 이렇게 국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의 얼굴들을 보여준다. 초기에는 유명 인사보다 20·30대 젊은 관료·의원들이 주축이었고, 1920년 하례식 사진에서 백범 김구(1876~1949)는 전면에 있지 않았다. 1921년 1월1일 상하이 융안백화점 옥상에서 촬영한 임정 59인 사진은 상하이·한성·연해주까지 난립했던 여러 계열이 통합돼 단일 정부를 갖게 됐음을 보여준다.
■ 이명필 흥사단 상하이지부장 “역사는 기억하는 데서 시작한다”
임시헌장이 보여준 ‘평등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라는 방향성은 1919년에 멈춰 있지 않았다. 상하이에서는 지금도 도산 안창호의 시민윤리와 교육 철학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그 중심에 흥사단 상하이지부가 자리한다. 15년 넘게 현지 교민과 관광객들에게 독립운동사를 알리고 있는 이명필 지부장(56·HERO 역사연구회 대표)이 그 활동을 이끈다.
이 지부장은 임시헌장의 출발점이었던 3·1운동의 의미부터 되짚었다. 그는 3·1운동이 단순한 만세 시위가 아니라 왕조 국가에서 민권 국가로의 전환을 선언한 혁명이었다고 강조했다.
“임시정부에서는 3·1절을 ‘3·1 혁명’ 또는 ‘독립선언절’이라고 불렀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처럼 전제정에서 민주공화정으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 인구 2천만명 중 200만명이 참여했어요. 세계 혁명사에서 그 나라 인구의 10분의 1이 참여한 혁명은 3·1 혁명이 유일합니다. 이후 유관순(1902~1920), 김마리아(1891~1944) 같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이름’으로 기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혁명이라고 불렀던 겁니다.”
그는 이 혁명 정신이 임시헌장으로 구체화됐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독립운동사를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은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임시헌장에 담긴 ‘신과 인간이 하나 되어 이 나라를 만든다’는 홍익인간 정신, 그리고 ‘내가 오늘 흘리는 이 피가 나의 독립이 아니라 후세의 자유와 복락을 위한 것’이라는 선서문의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흥사단 상하이지부는 도산이 가장 왕성한 독립운동을 펼쳤던 이곳에서 그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기억을 담아온 공간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현재 상하이 곳곳에 남아 있는 독립운동 유적지는 도시 개발 논리 앞에서 하나둘 모습을 잃고 있다. 현지인들에게는 과거 한국인의 흔적이 오늘의 삶과 무관한 낯선 과거로 여겨지기도 한다.
“공간이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집니다. 역사는 기억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있을 때 많이 찾고, 기록으로 남기고, 전해야 합니다.” 이 지부장의 말은 과거 회고에 머무르지 않는다. 독립운동 유적지를 보존하고 기억을 사회화하는 일은 ‘기념행사’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을 이어가겠다는 현재의 실천으로 연결된다. 공간이 남아야 기억이 이어지고, 기억이 이어져야 민주주의의 토대가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일제 법정에서 임시헌장 헌법으로, 그리고 오늘의 민주공화국
경인일보 광복·창간 80주년 특별기획은 식민지 시기 전후 일제의 법정 기록물에서 시작해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가들의 분투를 따라왔다. 법정에 선 그들이 남긴 진술서와 판결문은 단순한 저항의 기록을 넘어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고민이 1919년 상하이에서 임시헌장으로 결실을 맺었다. 인류보편의 가치를 담은 헌정 언어는 ‘독립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그들이 꿈꾼 나라는 폐쇄적 민족국가가 아니라 국제사회 속 평화와 상호보호 체제를 전제로 한 공동체였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민주공화국은 100여년 전 상하이에서 작성된 임시헌장의 원칙 위에 서 있다. 평등한 시민, 권력이 시민 위에 서지 않는 구조, 인권 보장, 국제 평화 기여…. 현행 헌법 전문에 명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헌정 질서의 뿌리다.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법정에서, 감옥에서, 전장에서 피 흘려 일군 이 민주주의를 우리는 오늘날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1919년 임시헌장이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며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다.
[출처]
1) 한인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 대한민국 임시헌장(1919.4.11) 제정의 역사적 의의, 서울대학교 법학 제50권 제3호, 2009, 170~174쪽 2) 장인호, 憲政史에서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헌장의 의미에 관한 연구, 성균관법학 제31권 제3호, 2019, 103~126쪽 3) 이재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체제와 변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7집, 2019, 117~122쪽
※ 위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상하이/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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