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풍경속 온기 ‘동경산수’
흰 여백은 눈, 담묵은 찬 공기
서로에게 기대며 사는 사람들
절제·비움의 예술 ‘회화 미학’
동장군이 “나 왔소”라고 인사를 하듯 12월 첫 주부터 전국에 폭설을 뿌렸다. 하얗게 내리는 눈을 보면 사람들은 무장 해제된 듯 천진해지면서도 금세 마음이 바빠진다.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이해야 하는 계절 겨울은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삶, 시간의 흐름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옛 그림을 볼 때 계절감과 시간성은 주제나 구도, 기법에 비해 그저 부차적인 표현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봄이면 살짝 핀 꽃을 그리고, 가을이면 낙엽을, 겨울이면 눈 쌓인 풍경을 그린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회화의 역사에서 계절과 시간 표현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위치에 있다. 화면을 구성하는 조형적 틀을 바꾸고, 관람자의 정서를 움직이며, 평범한 풍경을 의미 있는 장면으로 만드는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특히 예로부터 화가들은 어둡고 고요한 대기라든지 메마르고 차가운 공기 등 겨울의 계절적 느낌을 화면에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왔다. 당나라 화가 왕유(王維)는 눈 그리는 법을, 북송대 화가 곽희(郭熙)와 한졸(韓拙)은 각각 쓸쓸하고 적막한 운치를 나타내는 법과 시간에 따른 설경(雪景)의 다양한 모습을 제시했다. 명대 학자 당지계(唐志契)가 “눈경치의 제일가는 요점은 바람이 차서 몸이 떨릴 듯한 추위가 느껴져야 한다”고 한 말처럼 누구든지 겨울 그림을 보고 한기를 느낄 정도로 생동감이 있는지도 중요한 관건이었다. 이는 조선시대 화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정선(鄭敾)의 ‘동경산수’(冬景山水)는 이러한 겨울 그림의 요소를 두루 갖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늘은 먹구름이 드리운 듯 어둡고 많은 눈이 내린 뒤의 풍경처럼 산봉우리와 능선은 흰 눈에 덮여 형체가 희미하다. 버드나무는 세찬 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고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나그네는 몸을 움츠리고 가던 길을 재촉하고 있는데, 멀리 사립문에서 주인을 반기는 개 한 마리와 등불을 들고 기다리는 식구의 모습은 적막하고 스산한 풍경 속에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는 듯하다. 정선의 그림은 종이의 흰 여백은 눈이 되고, 몇 줄의 선은 형체가 되며, 옅은 담묵은 찬 공기를 연상시키는 겨울 산수의 전형을 보여준다.
겨울 그림이 흥미로운 이유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유교적 세계관 속에서 자연은 인간의 도리를 비유한 대상이었으므로 매화의 고결함, 소나무의 절개,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인내 같은 요소들은 형상을 넘어 사람이 지녀야 할 덕목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점은 추위와 생존이라는 현실에 대한 투영이다. 겨울은 농한기(農閑期)이자 저장기이기 때문에 화가들은 투전(鬪牋) 놀이나 장작 나르기, 옷 짓기, 사냥 등 그 시간을 견디며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풍속을 그리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조선의 겨울 그림은 차가움과 따뜻함이라는 상반된 세계가 공존한다. 산천은 차갑고 냉담하지만 그 안에 사람들은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간다. 계절의 순환이 절제와 비움을 통해 어떻게 예술로 승화되는지 보여주는 또 다른 회화 미학이다.
/황정연 한국학중앙연구원 조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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