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 거부한 ‘영화 황제’… 조선 독립, 그 무게를 얹다

 

1927년 中 극장·영화사 상하이 집중

독립운동가 부친 따라 망명 후 배우로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중국 최대 도시 상하이는 동아시아 근대화의 전초이자 절정이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인천과 닮았다. 빈한한 어촌에 불과했던 상하이는 개항장으로 지정되면서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조계(租界·외국인 거주 치외법권 구역)가 설치된다. 이후 상하이는 동아시아 최대 경제 중심지이면서 근대 문물과 중국 전통 문화가 뒤섞인 혼종도시로 발전한다. 경제뿐 아니라 정치·문화적 자유가 확산한 당시 상하이를 ‘올드 상하이’라 부른다. ‘동양의 파리’로도 불렸다. 지금도 상하이 와이탄 등지에 있는 화려한 ‘근대의 마천루’를 통해 올드 상하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가 상하이를 침범하면서 제국주의의 상처를 안게 된 도시이기도 하다.

서양인, 일본인, 인도인, 유대인, 러시아인은 물론 식민지 조선에서 망명한 독립지사들도 상하이에 모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 둥지를 틀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식민지 조선에서 상하이로 떠난 건 독립운동가뿐이 아니었다. 창작의 자유를 찾아 상하이로 진출한 조선 영화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항일 영화로 민족의식을 표출하면서도 상업 영화를 제작하거나 출연해 올드 상하이의 예술가로 삶을 살았다.

‘상하이 영화 황금시대’라 불린 시기였다. 그 중심에는 중국의 ‘영화 황제’로 등극한 배우 김염(1910~1983·본명 김덕린)이 있다. 월미도에 있는 인천시립박물관 분관 한국이민사박물관이 내년 2월26일까지 특별전 ‘상하이 영화 황금시대의 조선 영화인들’을 진행 중이다. 이민사의 관점에서 풀어 낸 이번 전시를 통해 김염의 불꽃 같은 삶을 재조명하고 있다.

‘열혈남아’ 데뷔… 일약 스타덤 올랐지만

주로 항일작품 출연, 인기 배우 면류관 사양

김염 출연작 ‘사람의 도리’ 스틸컷.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
김염 출연작 ‘사람의 도리’ 스틸컷.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

■ 면류관을 거부한 영화 황제

1927년 중국의 극장 156곳 가운데 35곳이 상하이에 있었다. 그해 중국 179개 영화사가 제작한 영화 178편 중 상하이에 있는 142개 영화사가 172편을 제작했다. ‘신보’(申報), ‘민보’(民報) 등 영화 전문 매체가 발행됐으며 롄화영화사, 스타영화사, 천일영화사 등이 트로이카를 이루며 스타 배우를 발굴했다.

김염은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망명했다. 명망 있는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김염의 아버지 김필순(1878~1919)은 세브란스의대 1회 졸업생이자 1호 의사다. 그는 안창호(1878~1938)와 신민회 등 독립운동을 후원하다가 1911년 ‘총독암살미수사건’(105인 사건)으로 중국 치치하얼로 망명해 한인 이상촌을 건설하고 병원을 운영했다. 김필순은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독립유공자다.

김필순은 일본 밀정에 의해 독살당했다. 김염은 고모 김순애(1889~1976·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와 임시정부 부주석으로 활동한 고모부 김규식(1881~1950·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있는 상하이로 왔다가 지난, 톈진 등으로 옮겨 다니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17세 김염은 상하이로 돌아와 영화사 기록원으로 일하다 남국예술극단에 입단하며 배우의 길을 걸었다. 예명인 김염은 중국의 대문호 루쉰의 작품에서 따왔다고 한다. 김염은 당대 대표적 영화감독 쑨위(1900~1990)의 영화 ‘열혈남아’로 데뷔해 ‘야초한화’ ‘연애와 의무’ 등 흥행작에 출연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김염은 당시 ‘전성일보’의 중국 10대 영화 스타 투표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가장 멋있는 남자 배우’ ‘내가 친구로 삼고 싶은 배우’ 등 3개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며 영화 황제가 됐다.

그러나 김염은 일제가 침탈한 상하이에서 면류관을 거부한 채 ‘일전매’ ‘대로’ ‘사람의 도리’ ‘들장미’를 비롯한 항일 영화에 주로 출연했다. 특히 김염은 그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대로’에서 잘생긴 외모와 진정성 있는 순박한 연기로 어두운 사회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는 낙천적인 도로건설공의 모습을 보여주며 찬사를 받았다.

한국이민사박물관 특별전 ‘상하이 영화 황금시대의 조선 영화인들’ 전시장 모습. 가운데 서 있는 인물이 중국 영화 황제 김염이다. 2025.12.5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한국이민사박물관 특별전 ‘상하이 영화 황금시대의 조선 영화인들’ 전시장 모습. 가운데 서 있는 인물이 중국 영화 황제 김염이다. 2025.12.5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1937년 상하이를 손에 넣은 일본은 김염에게 친일 영화에 참여하라고 강요했다. 김염은 ‘기관총으로 협박해도 그 따위 영화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상하이를 탈출해 홍콩, 충칭 등을 전전하며 망명 배우 생활을 했다. 자신의 브로마이드를 판 돈을 항일 단체에 지원하고, 안중근의 친형이기도 한 독립운동가 안공근(1889~1939)을 모델로 ‘영웅혈루’ 대본을 쓰기도 했다. 김염은 1945년 일본 패망 후 미국 할리우드 진출을 제의받기도 했으나, 미국행을 포기하고 한인들의 귀향을 도왔다. 쑨위는 김염에 대해 “김염의 천부적인 연기력은 조선인이면서 또 중국인으로 살아왔던 불안과 사회에 대한 불만을 연기로 승화하고 영화로 불태웠다”고 평가했다. ‘아리랑’의 저자 님 웨일즈는 “나는 그의 아름다운 육체 너머로 아름다운 영혼을 보았다”고 했다.

이주 조선인 1930년대 ‘양자강’ 제작 동포 시사회

日 비판·생존 투영된 창작활동… 모국 그리움 묘사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2월26일까지 ‘특별전’

■ 상하이의 조선 영화인들

한국이민사박물관 특별전 ‘상하이 영화 황금시대의 조선 영화인들’ 전시장 모습. 2025.12.5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한국이민사박물관 특별전 ‘상하이 영화 황금시대의 조선 영화인들’ 전시장 모습. 2025.12.5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한국이민사박물관 특별전에서는 김염과 함께 상하이에서 활동한 조선 영화인들 이야기를 전시하고 있다.

소설가이자 평론가 김광주(1910~1973)는 18년 동안 상하이와 중국에 머물며 동인지 ‘습작’과 ‘보헤미안’을 발간했고 전창근, 이경손, 정기탁, 한창섭, 김일손 등 영화인들과 교류했다. 동료들과 ‘사선을 넘는 무리들’ 등 항일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김광주는 ‘신보’에 영화평과 감독론 등의 글을 연재하며 망명한 조선 영화인들의 연결 고리 역할을 했다. 전시에선 김광주가 지낸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 영경방 10호 정자간의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을 선보이고 있다. 김광주는 소설가 김훈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망명 조선인들은 1930년대 상하이에서 14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연출·촬영·배우·각본 등을 모두 조선인의 손으로 만든 영화 ‘양자강’을 제작해 동포들을 대상으로 시사회를 열기도 했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척살을 소재로 한 ‘애국혼’, 부모의 복수와 권선징악을 표현한 ‘화굴강도’ 등 항일 영화부터 무협영화와 신출귀몰의 특성을 합한 ‘대파구룡산’, 여성 해적을 주인공으로 한 ‘여해도’, 멜로영화 ‘정욕보감’ 등 상업 영화로도 활발하게 진출했다.

2005년 중국 영화 100주년을 맞아 발행된 김염 기념 우표와 그의 부인이자 유명 배우 친이 기념 우표.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
2005년 중국 영화 100주년을 맞아 발행된 김염 기념 우표와 그의 부인이자 유명 배우 친이 기념 우표.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
근대 상하이 와이탄 사진 엽서.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
근대 상하이 와이탄 사진 엽서.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은 “이들은 망명의 원인이었던 일제의 한반도 침탈을 비판하면서 생존을 위해 상업 영화를 제작하는 등 망명자의 삶이 투영된 창작 활동을 했다”며 “전통과 현대 사이의 여성 관련 영화를 만들어 그 여성상을 통해 모국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봉건제에서 근대화로 탈출하려는 당시 상하이의 사회, 정치, 이념, 문화를 묘사했다”고 말했다.

전시에선 상하이의 도시 구성, 거리의 공중전화와 인력거, 한인들이 주로 종사했던 검표원(인스펙터) 등을 재현했다. 김염과 망명한 조선 영화인들의 활동을 스틸 사진과 영상 자료, 기고문, 포스터 등을 통해 보여준다. 2005년 중국 영화 100주년을 맞아 발행된 김염 기념 우표와 그의 부인이자 유명 배우 친이 기념 우표도 볼 수 있다. 전시 자료 제공은 김염의 후손이자 ‘상하이 올드데이즈’(민음사·2003)의 저자 박규원 작가가 도움을 줬다. 김태익 인천시립박물관장은 “이번 전시는 예술인이라는 특수한 분야의 이주 상황에 관심을 갖고 이민사의 맥락에서 포착했다는 점에서 새롭고 뜻깊다”며 “상하이 영화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망명 조선인 영화인들의 민족정신과 예술세계를 함께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