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거란 제압한 1219년 최고 활약 김취려
195cm 장신, 긴 수염의 기이한 풍모
“진정으로 충성되고 의로운 사람” 평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아주 오래전부터 한 번이라도 조용한 적이 없었다. 고려시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국 북동부 지역의 세력 변화에 따라 고려 침략이 계속되었고, 일본 열도 쪽에서의 노략질도 끊이지 않았다. 이 중에서도 특히 고려-거란 전쟁은 한반도의 운명이 통째로 넘어갈 뻔한 결정적 장면으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흔히 고려-거란 전쟁의 영웅으로 외교력에서는 서희, 전투력에서는 강감찬 장군을 꼽는다. 여기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이 있다. 김취려(金就礪, 1172~1234) 장군. 고려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난 이태 뒤에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김취려 장군의 묘소는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에 있다.
김취려 장군의 활약상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그리고 강화 묘소에서 나온 ‘묘지명’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고려사절요’의 기록에서는 김취려 장군의 풍모까지 상세히 살필 수 있다.
그의 겉모습은 어땠을까. 현재 중국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까지 중국 삼국시대 관우 장군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 많다. 그곳에서는 그의 외모를 나타내는 그림이나 동상을 세워 놓고 있는데, 하나같이 가슴과 배를 가릴 만큼 수염을 기다랗게 표현하고 있다. ‘고려사절요’ 속의 김취려 장군 묘사가 딱 관우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거란은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1019년) 등으로 인한 엄청난 패배에도 불구하고 1217년(고려 고종 4년)에도 고려 침입을 계속했다.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 충청도 등 전국이 피해를 당했다. 그해 3월에는 고려군이 평안남도 서북단에서 크게 패해 개성 선의문 일대까지 거란군이 들이닥칠 정도였다. 1218년에도 거란군은 한반도 전역을 휘저었다.
고려군이 거란군을 제압한 것은 1219년에 들어서면서였다. 이때 최고 활약을 펼친 이가 김취려 장군이다. 당시 김취려 장군과 조충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은 몽골군과 연합 작전을 펼쳐 거란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몽골 장군과 김취려 장군이 만났을 때 몽골 장군은 김취려 장군의 외모를 보고는 그 기세에 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6개국을 정벌하면서 별의별 사람을 다 보았지만 김취려 장군처럼 기이한 용모를 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고 몽골 장군은 말했다. ‘고려사절요’ 1219년 1월 기록에 김취려 장군의 외모를 설명한 대목이 있다.
“신장이 6척 5촌이요, 수염이 배(腹)를 지나므로, 매양 정장복(正裝服)을 입을 때에는 반드시 두 계집종에게 그 수염을 갈라 들린 뒤에 띠를 띠었다.”
키가 195cm가 넘었고, 수염이 배 밑까지 닿을 정도로 길고 그 숱이 많아 옷을 차려 입을 때는 수염을 여종 둘이서 나누어 든 뒤에야 허리띠를 맬 수 있었다는 얘기다.
평양 동쪽 강동성을 차지하고 있던 거란군의 대장은 스스로 목을 매 죽었고, 5만여 명이 항복했다. 이때 거란의 포로들을 전국 각지에 보내 논밭을 주고 농사를 지으며 살게 했다. 그들이 모여 사는 곳을 ‘거란장(契丹場)이라 했다.
김취려 장군은 1234년 5월에 타계했는데, ‘고려사절요’는 “싸움에 임하여 적을 제어함에 이르러서는 기이한 계교를 많이 내 능히 큰 공을 이루었다. 진정으로 충성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김취려 장군은 1216년 거란과의 전투에서 크게 이긴 적이 있는데, 이때 전장에서 큰아들을 잃기도 했다.
그의 묘지명에는 “7월 12일 진강현(鎭江縣) 대곡동(大谷洞) 서쪽 기슭에서 장례지냈다”고 쓰여 있다. 장군의 이름은 김취려(金就呂)로 돼 있다. 진강현 대곡동은 지금 묘소가 있는 강화도 진강산 서쪽 기슭을 일컫는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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