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란 논리가 정연해야 한다

현실 끌어가는 견인차이기 때문

현재 논리와 과거 가치부여 사이

어긋남 있다면 스스로 성찰해야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공부라는 것은 들어갈수록 어려운 게 아닌가 한다. 젊은 날 중차대한 문제라 여겼던 것이, 그래서 몰두했던 것이, 나이 들어 돌이켜 보면 2차적인 의의밖에 없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만하면 꽤나 쌓아놓은 것 같았는데, 다시 생각하고, 선인들, 선배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쌓아 올린 것들이 새삼스럽게 의식되면, 자신의 초라함에 고개 숙이게도 된다. 자신만만하게 극복했노라 생각했던 논리가 훨씬 더 큰 무게감으로, 오히려 더 귀중한 것으로 새롭게 다가오는 일도 하나둘 아니다. 공부를 어렵게 여기고 무섭게 알도록 하는 것 중 하나는 대학이라는 제도권에서 학위라는 것을 따고 가르치는 직책을 얻으며 쌓아 올린 것들이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것에 비해 별 것 아님을 깨닫게 될 때다.

요즘 대학을 생각하면, 대학에는 어른이며 대가는 없다 해도 과언 아닐까 생각하게 될 때가 많다. 적어도 인문학에서는 그렇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는 바람에 대학에서 정년을 하고도 10년, 20년을 현역처럼 공부하는 분들이 많은 까닭에, 대학에 적 붙이고 있는 교수라는 것은 그냥 ‘애’들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자신의 학문을 대단한 것처럼 뽐내고, 자신의 경향이나 학설 아닌 이들에 대해서, 더구나 대학에 적을 붙이지 않고 사설 연구소에서나 개인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으스대기라도 하는 것 같으면, 속으로 혀를 차게 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요즘은 애들도 다 환갑이라고, 아이들 턱에 흰 수염이 난 것이다.

이른바 역사 해석, 고대사 해석 문제를 둘러싼 논란의 풍경도 그렇게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문제의 하나다. 무슨 굉장한 연구를 했더냐는 말이다. 단재 신채호 같은 분이 펼쳐갔던 그 치열한 사투의 한쪽이라도, 그 분이 접했던 북방 제 민족과 중국의 사서들을 얼마나 보았다고 자신하느냐 말이다. 남을 향해 폄훼의 멸칭들을 쉽게도 발설하며 자신은 얼마나 무서운 아이라고 자신하느냐 말이다. 산골짜기 처처에 ‘자연인’이라고, 숨어 있는 무서운 사람들이 보이지 않더란 말이냐.

이런 역사적 진실의 문제가 지극히 불투명하고 의심스러운 정치적 동기들과 맞물리거나 그런 것들을 배후로 거느리며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는 움직임들을 볼 때는 더 허망하다. 현재를, 한 치 앞의 미래를 못 보는 눈으로 무슨 굉장한 고대사를 투시라도 하는 듯 자신만만해 하느냐는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고대사를 제물 삼아 현재의 치세를 도모하려는 게 아니냐는 말이다.

허탈함은 그 반대편에서도 온다. 민족의 현실을 객관적, 현실적으로 보고, 헛된 주관주의를 경계한다면서 한국인들에 있어 민족이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나, 아니, 삼일운동 때나 ‘발견’된 것이라면서, 서양 이론에서 함부로 배운 지식을 값싸게 활용하기에 급급한 견해들, 일제때 일본인 학자나 그들에게서 배운 사람들 아니면 모다 환상에나 빠진 사람들로 보는 근거 없는 지적 허영에 들떠 있는 사람들, 이런 논리와 태도로 어떻게 민족의 현실을 바로 보고 그 재흥을 도모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공부는 어렵고, 역사 공부 같은 것은 더 멀리 보고 넓게 찾아야 하는 것이어서 더 어려울 것 같다. 나는 언젠가 ‘역사혁명’을 말했고, 이에 관련된 몇몇 분들의 이름을 열거하기도 했으나, 고대사의 무엇을 판정할 수 있다는 뜻은 전혀 없었고, 그 분들이 전적으로 옳다는 뜻도 아니었다. 다만 시사점들이 많고, 흥미로운 점들이 있다고 여긴 것뿐이다.

나는 문학연구를 하는 사람이다. 역사의 진실에는 다소 둔하지만, 역사가란, 저 먼 고대로부터 오늘의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당겨 무서운 활을 쏘듯이 논리가 정연해야 한다. 논리는 단순히 논리가 아니요 현실을 끌어가는 견인차인 때문이다. 현재를 보는 논리와 과거에의 가치 부여 사이에 어긋남이 있다면 스스로를 깊이 성찰해야 한다. 대전에서 그 ‘재야’라고 불리는 학자 한 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은 중국어는 물론 만주어와 몽골어와 카자흐스탄어를 알고 그 문적들을 자유자재로 읽었다. 놀라웠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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