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향할수록 ‘무거운 마음’
3·4층 몸돌·지붕돌·상륜부 유실
기울어지고 모서리도 많이 깨져
‘봉은사지’ 규모·위치 등 수수께끼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 193번지, 봉천산 남쪽 자락에 보물 제10호로 지정된 석탑이 있다. 이름하여 장정리 오층석탑. 강화도 유일의 고려시기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그 희소성 때문인지 보물 지정 시기도 1963년 1월로 꽤 오래되었다.
장정리 오층석탑은 보는 이의 마음을 무척이나 무겁게 만든다. 일단, 오층석탑이라고 하지만 기단부 위에 올려진 탑신을 이루는 지붕돌이 4개뿐이다. 지붕돌을 받치는 몸돌 역시 아래 2개 층에만 놓여 있고 3층과 4층부에는 몸돌이 없다. 맨 위층의 지붕돌과 탑의 꼭대기를 구성하는 상륜부는 아예 흔적조차 없다. 위로 올라갈수록 높이가 층마다 줄어드는 체감률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다. 몸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정리 오층석탑이 보물로 지정된 이유는 고려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틀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유산청은 장정리 오층석탑에 대해 ‘신라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변형된 고려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장정리 오층석탑은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보물 지정 기념비 앞 정면에서 보면 그나마 탑의 모양새가 많이 갖춰진 모습이다. 보는 위치가 지대석 아래여서 약간 올려다 볼 수밖에 없는데, 이 때문에 4개의 지붕돌 아래쪽 바닥을 잘 볼 수 있다. 1층 지붕돌의 아랫면에는 계단식으로 깎은 면이 4개인데, 위의 지붕돌 3개의 계단은 3개씩이다. 기단부의 상대석을 받치는 하대석이 동서남북 4개이고, 1층 지붕돌을 받치는 몸돌은 2개를 붙여 놓았고, 2층 몸돌은 하나뿐이다.
동쪽에서 바라보는 장정리 오층석탑은 그야말로 기우뚱하여 무너질 듯 보인다. 2층부터는 중심이 맞지 않아 기울어진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몸돌조차 없는 데다 2~4층의 지붕돌 모서리가 많이 깨져 나갔기 때문이다. 누가 일부러 무너트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파손 정도가 심하다.
장정리 오층석탑은 “저 탑의 원래 모습은 어땠을까”라고 보는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는 국내 최고의 석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상상력을 채우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석탑의 역사와 시대별 조형미의 흐름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 뒤에야 장정리 오층석탑의 ‘무너져 내린 아름다움’을 마음 속에서 찾아낼 수가 있다. 이런 점에서 장정리 오층석탑은 심미안(審美眼)을 키우는 콘텐츠로 삼기에 손색이 없다.
장정리 오층석탑 앞에 세워진 설명문에는 ‘봉은사지(奉恩寺址) 오층석탑으로도 불린다. 봉은사는 개성에 있던 고려시대의 국가사찰로 고종 19년(1232)에 수도를 강화도로 옮길 때 함께 옮겨졌다’고 돼 있다. 탑 옆에는 이곳이 봉은사지임을 알리는 설명판도 세워 놓았다.
하지만 이곳이 수도를 옮기면서 새롭게 개성의 사찰을 본떠 만든 봉은사 터라고 보기에는 여러 측면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수도를 옮긴 지 이태 뒤인 1234년 2월, 고종이 연등(燃燈) 행사를 위해 봉은사에 갔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보인다. 또, 관료의 집을 봉은사로 삼고, 민가를 헐어 왕이 타는 연(輦)이 다닐 길을 넓혔다고 돼 있다.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개성에 있던 궁전과 절 등을 그대로 되살렸다. 봉천산은 고려 궁궐이 있던 강화읍과는 너무나 멀다. 당시 봉은사의 위치는 강화읍 중심지에서 멀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현재 오층석탑이 있는 봉은사 터는 규모 면에서도 국가사찰로서의 격에 맞지 않게 작다.
아무튼, 장정리 오층석탑은 탑이 보여주는 묵직함만큼이나 많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음에 틀림없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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