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군고구마를 떠올리는 추억
내면 선함을 지속하게 만드는 힘
올 한해 많은 긴장·혼란 지나와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 기억을
12월의 끝자락이 되면 우리는 자연스레 한 해의 삶을 돌아본다. 지나간 시간은 겨울 저녁 하늘처럼 마음 위에 잔잔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사람들은 무엇을 이루었고 무엇을 놓쳤는지를 차분히 되짚는다. 성취와 아쉬움이 교차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묻게 된다. 다가오는 새해를 맞으며, 과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마음에 간직할 것인가.
우리가 오래도록 삶의 기준으로 삼아온 보편적 가치는 흔히 ‘진·선·미’로 표현할 수 있다. 진(眞)은 삶의 방향을 묻고, 선(善)은 책임 있는 실천을 요구하며, 미(美)는 삶을 물질적·정신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질문을 품은 채 한 해를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중에서도 ‘아름다움’에 잠시 머물러 보기를 권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연말은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예수 탄생의 의미를 자기 삶과 겹쳐 성찰하는 시간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린 시절 성탄 트리의 불빛과 눈 쌓인 거리, 겨울밤 군고구마의 온기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시간을 가질 것이다. 이런 순간들이야말로 크지 않지만 분명한 아름다움의 원천이다.
이 아름다움은 단순한 감각적 즐거움이나 계절적 분위기를 넘어선 것이다. 그것은 자기 내면의 진실을 비추는 작은 등불이며, 선함을 지속하게 만드는 힘이다. 동시에 혼란과 균열 속에서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마음 깊은 곳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이것은 한 해 동안 겪어 온 사회적 갈등과 불안, 그리고 과잉 생산되는 정보와 무책임하게 난무하는 언어의 소음 속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내는 내면의 방어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아름다움이다.
오늘의 사회는 타인의 상처를 품기보다 자신의 정당성을 앞세우는 데 익숙해졌다. 그럴수록 조용하지만 단단한 아름다움의 힘은 더욱 중요해진다. 이 아름다움은 언제나 ‘관계’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누군가의 고단함을 알아차리는 한마디 말, 타인의 실수를 덮어주는 배려, 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잠시 하늘을 바라보는 여유, 감정이 앞설 때 침묵을 선택하는 절제. 이는 거창한 미학이 아니라, 효율과 속도의 사회 속에서 잊히기 쉬운 작은 품위이며 공동체를 정화하는 힘이다.
진실은 삶의 방향을 세우고, 선함은 사회를 지탱한다. 그러나 진실은 때로 날이 서서 관계를 베어내고, 선함은 강요될 때 도덕적 부담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반면 아름다움은 강요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진실을 찾게 하고, 선함을 선택하게 만든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힘은 명령이 아니라 ‘끌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진과 선으로 나아가는 가장 온유하고도 지속적인 출발점이다.
2025년 한 해 우리는 유난히 많은 긴장과 혼란을 지나왔다. 정치적 갈등은 여전히 봉합되지 않았고, 세대 간 대화는 멀어졌으며, 혐오와 불신의 언어는 일상이 되었다. 이럴수록 우리는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아름다움이 주는 지혜를 회복해야 한다. 타인을 적으로 규정하지 않은 시선, 말할 수 있어도 굳이 말하지 않는 절제, 욕망을 비워 공동체를 향할 수 있는 여유, 상처 입은 이에게 비난을 던지지 않는 유연함이 바로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삶의 태도다. 이는 사회를 숨 쉬게 하는 숲속의 맑은 공기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은 화려한 미학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의 미학이다. ‘함께 살아간다’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힘이다. 조용하지만 밝고, 부드럽지만 단단한 이 아름다움이 한 해의 끝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다가오는 2026년을 향한 새로운 도약의 원천이 되기를 바란다.
“자신을 지키는 이 작은 아름다움이 당장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그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람이 세상을 조금씩 바꿀 수 있다.”
새해를 맞으며, 각자의 소중한 아름다움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희망을 향해 다시 걸어가길 바란다.
/김영호 성공회대 석좌교수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경인일보 Copyright ⓒ kyeong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