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청서 쏟아져 나올 ‘진짜 직장인’들과 마주치기 싫어

지하매점으로 내려갔다… 무거운 공기·패배자들 냄새

2500원짜리 야채김밥 옆구리가 터져 있었다, 차가웠다

 

“어머, 작가님?” 명랑한 목소리의 도서관 김지연 사서

“작가님 등단작 ‘심해의 방’ 아직 대출 이력 ‘0’이에요”

장서 폐기 기준 ‘대출실적 전무해 이용가치 상실 도서’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장면 3] 1,150만 원짜리 진통제와 검은 비명

오후 2시 10분. 도서관이 거대한 위장(胃腸)으로 변하는 시간이다. 점심을 먹은 수백 명의 인간이 뿜어내는 이산화탄소가 천장에 고여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공기가 젤리처럼 끈적해진다. 여기저기서 끄윽, 트림을 참는 소리와 뱃속에서 꾸르륵거리는 소화음이 교향곡처럼 들려왔다.

내 뇌도 소화되고 있었다. 식곤증과 자기혐오가 한 덩어리가 되어 전두엽을 짓눌렀다. 모니터 속 커서는 30분째 제자리에서 깜빡였다. 저 깜빡임이 “너 병신이야? 너 병신이야?” 하는 모르스 부호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슬그머니 Alt+Tab을 눌렀다. 하얀 워드 프로세서 창이 사라지고, 익숙한 빨간색 로고가 떴다. ‘엔카’. 내 유일한 마약.

검색 필터를 능숙하게 세팅했다. 현대 > LF 쏘나타 > LPG > 주행거리 10만킬러미터 이하 > 무사고. 엔터. 화면에 매끈하게 닦인 흰색 쏘나타들이 줄지어 떴다.

[16년형, 렌트 이력 있음, 휀다 단순 교환, 1,150만 원.]

나는 딜러가 써놓은 ‘성능 기록부’를 경전처럼 읽어 내려갔다. 미세 누유 없음. 조향 장치 양호. 내 통장 잔고는 28만 원이다. 다음 달 월세도 밀릴 판이다. 하지만 나는 계산기를 두드렸다. 60개월 할부로 하면 월 20만 원… 담배를 끊고, 커피를 줄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 차를 사면 7번 국도를 달릴 수 있다. 바다를 보면, 그 지평선을 보면 막힌 첫 문장이 뚫릴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인 걸 안다. 차가 없어서 글을 못 쓰는 게 아니다. 그냥 내가 썩은 거다. 하지만 나는 그 **‘1,150만 원짜리 진통제’**를 끊을 수가 없었다. 모니터 속 차가운 금속성 광택만이 나를 위로했으니까.

탁!

고요한 수면 위로 돌멩이가 떨어진 듯한 파열음.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 43번, ‘회색’이었다.

그가 볼펜을 책상에 내리꽂았다. 도서관 바닥에 떨어져 굴러가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의 그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6개월 동안 단 한 번도 볼펜을 떨어뜨린 적이 없다. 늘 0.5초의 오차도 없이 책장을 넘기던 인간 메트로놈이 멈췄다.

그는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액정 불빛이 그의 창백한 턱 밑을 유령처럼 비췄다. 무슨 문자가 온 걸까. 최종 합격? 불합격? 아니면 “더는 뒷바라지 못한다”는 고향 집의 통보?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처음엔 웃는 줄 알았다. 하지만 곧이어 “으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두 손으로 자기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회색 후드 모자가 벗겨지고, 떡진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왔다. 그는 머리카락을 뽑을 기세로 당기고 있었다.

내 모니터 속 쏘나타는 이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무서웠다. 그가 무너지고 있었다. 나의 전우, 나의 거울, 나의 성실한 경쟁자였던 그가, 마치 나사가 풀린 기계처럼 해체되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벌떡 일어났다. 끼이익―.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름 끼치는 소리. 사람들이 일제히 43번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이미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 같았다.

그는 책상 위의 물건들을 가방에 쓸어 담기 시작했다. 정리? 아니, 그건 청소였다. 쓰레기를 치우는 몸짓이었다. 아끼던 토익 책이 구겨지든 말든 가방에 처박았다. 필통 지퍼를 잠그지도 않고 던져 넣었다. 좌르륵, 볼펜들이 가방 안에서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가는 거야? 지금? 오후 2시에?’

공포감이 엄습했다. 저 자리는 그의 요새였다. 그가 저기서 버텨주었기에, 나도 “저놈도 하는데 나도 버텨야지” 하고 자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탈영한다. 이 좆같은 전선에서 나만 남겨두고.

그는 가방을 둘러메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쾅. 유리문이 닫히며 3열람실의 공기가 한 번 출렁였다.

적막이 다시 찾아왔다. 사람들은 “뭐야?” 하고 몇 마디 수군대더니, 1분도 안 돼 다시 고개를 처박았다. 도서관은 잔인할 만큼 회복력이 빨랐다. 타인의 불행이나 이탈 따위는 금방 소화해 버리는 거대한 위장처럼.

텅 빈 43번 자리. 그곳에는 그가 떨어뜨린 다이소 탁상시계와, 지우개 가루, 그리고 책상 모서리에 붙여두었던 노란색 포스트잇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43번 자리 옆을 지나갔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 나는 슬쩍 손을 뻗어 그 포스트잇을 낚아챘다. 손바닥에 땀이 차서 종이가 쩍 달라붙었다.

화장실 가장 안쪽 칸. 나는 문을 잠그고 변기 커버 위에 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훔쳐 온 종이를 폈다.

무언가 적혀 있을 줄 알았다. [엄마 미안해] 라든가, [할 수 있다] 같은 진부한 다짐이라도.

없었다. 글자가 없었다. 대신 난도질이 있었다.

검은 볼펜으로 한 곳을 미친 듯이 그어댄 자국. 가로, 세로, 대각선. 수백 번의 선이 겹치고 겹쳐서, 종이 한가운데가 시커멓게 파여 있었다. 잉크 찌꺼기가 뭉쳐 번들거렸다. 종이는 거의 뚫리기 직전이었다. 뒷면을 보니 볼펜 심이 눌러 쓴 자국이 우둘투둘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 좁은 종이 위에서 볼펜을 쥐고 “씨발, 씨발, 씨발!” 하고 비명을 질러댔을 그의 손놀림이.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검은 덩어리는 내 원고보다 더 소설적이었다. 나는 5년 동안 단 한 번도 이렇게 뜨겁게 종이를 학대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늘 폼 나는 문장을 쓰려고 키보드만 살살 두드렸지, 이렇게 바닥까지 긁어본 적이 없다.

그는 떠났고, 나는 남았다. 그는 자기 분노를 토해내고 떠났는데, 나는 내 분노를 예쁜 문장으로 포장하려다 실패해서 여기 남았다.

나는 구겨진 포스트잇을 바지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허벅지에 닿는 종이의 감촉이 날카로웠다. 마치 훔친 흉기처럼.

자리로 돌아왔다. 모니터엔 여전히 [무사고 쏘나타]가 떠 있었다. 나는 마우스를 잡고 창을 닫았다. X 버튼을 누르는데 손가락이 떨렸다. 도망칠 곳은 없다. 7번 국도 따위는 없다.

나는 처음으로 빈 워드 프로세서 화면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주머니 속에서 그 검은 비명이 바스락거렸다.

[장면 4] 은행 사은품 노트와 도둑질

오후 6시 30분. 도서관의 물이 갈리는 시간이다. 낮 시간을 죽치던 등산복 노인들과 전업주부들이 저녁밥을 차리러, 혹은 먹으러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그 빈자리를 학교가 끝난 교복들과, 퇴근한 직장인들이 밀물처럼 채운다.

공기의 냄새가 바뀐다. 파스 냄새와 묵은 나물 냄새가 빠지고, 치킨 냄새, 떡볶이 국물 냄새, 그리고 밖에서 묻혀 온 차가운 매연 냄새가 섞인다. ‘생활’의 냄새다.

사람들이 가방을 싸서 우르르 나갔다. 지이익, 지이익. 여기저기서 패딩 지퍼 올리는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나도 배가 고팠다. 위장이 비어서 쪼그라드는 느낌이 났다. 하지만 엉덩이를 뗄 수 없었다. 지금 나가면 저 ‘저녁이 있는 삶’을 사는 인간들과 섞여야 한다. 나는 그들의 활기찬 귀가 행렬에 끼어들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어둠 속에 남아 ‘야근하는 고독한 작가’ 코스프레를 하는 편이 내 쪽팔림을 가리기엔 유리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바스락. 아까 화장실에서 훔쳐 온 43번의 포스트잇. 손끝에 닿는 구겨진 종이의 모서리가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노트북 화면을 보았다. 하얀 워드 창. 커서는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장편_최종_수정_진짜최종_V3.docx

갑자기 토기가 치밀었다. 역겨웠다. 저 하얀 화면도, 그 위에 쓴 가짜 문장들도. ‘심해의 방’? ‘우울의 미학’? 개소리다. 나는 지난 5년간, 내가 겪어보지도 않은 고통을 있어 보이는 형용사로 포장해서 팔아먹으려 했다. 쥐뿔도 없는 주제에 폼만 잡았다. 진짜 고통은 심해가 아니라, 이 3열람실의 쉰내 나는 공기 속에, 2,500원짜리 터진 김밥 속에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