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각색 연극 ‘순환의 법칙’
호텔 방 움직이고 작아지는 설정
미주 역할, 무대 오르내리기 반복
비상구 없는 구조가 만들어낸 순환
연극 ‘순환의 법칙’(안보윤 원작, 최호영 각색·연출, 2025년 12월19~21일, 서울연극창작센터 서울씨어터 제로)은 불안정한 청년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청년실업, 다단계, 취업 브로커, 보이스 피싱의 소재를 활용해 청년세대의 불안정한 삶을 묘파하고 있다. 이들의 지난한 삶을 드러내는 장치는 원한의 순환적 상상력이다.
등장인물은 미주, 도운 그리고 남자이다. 미주는 찜질방에서 먹어치운 미역국만 백 그릇이 넘는다. 벌써 두 달째다. 도운의 돈을 훔쳐 도망친 이래 찜질방을 전전하고 있다. 그런 미주에게 호텔 무료 숙박권이 날아든다. 선불기간이 끝나 마침 찜질방을 나가야 하는 날짜에 말이다. 이벤트 경품에 당첨된 것이다. 미주가 호텔 705호에 묵게 되면서부터 이야기가 진전된다.
도운은 다단계의 싱글벙글맨이다. 정말 열심히 일한다. 그래야 학자금 대출을 갚고 방 월세를 내고 건보료를 내고 식비를 해결할 수 있으니까. 도운은 열심히 일하는 게 무슨 잘못이냐고 항변한다. 도운이 열심히 일하면 누군가는 피해를 본다. 딸 결혼자금을 홀랑 날리거나 전세보증금을 빼고 사채를 써서 노숙자가 되기도 한다. 미주는 도운의 피해자이다. 미주는 조부모의 적금 통장과 마지막 학기 대학 등록금과 보험 담보대출금을 쏟아부었다.
남자는 서른다섯에 취업 브로커가 되었다. 남자는 자신이 당했던 수법을 그대로 썼다. 마이너스 통장에 대출금 통장을 만든 피해자가 늘수록 남자는 점점 더 잘살게 되었다. 남자는 그걸 플러스 궤도에 올랐다고 표현했다. 최근에는 작은 인쇄소 하나가 망했고 철물점 하나가 사라졌다. 남자의 플러스 궤도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철물점 주인이 염산이 든 병을 남자에게 던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남자는 놀라운 순발력으로 병을 피했으나 그 옆에는 아이가 있었다. 구급차 앞을 가로막은 도운의 자동차 사고로 도로에 갇힌 남자는 죽어가는 다섯 살 아이를 안아주지도 못했다. 남자의 플러스 궤도는 그렇게 멈추게 된다.
이번 공연은 동명의 단편 소설을 각색해서 무대에 올렸다. 원작 소설의 내용을 충실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 자체보다는 이야기를 무대화하는 장치가 중요하게 된다. 무대의 문법은 소설의 문법과는 다르다. 비가시적인 묘사와 내면 독백을 가시화해서 무대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소설에서 중요한 장치 중 하나가 705호의 호텔 방이 움직이고 작아지고 가라앉는다는 설정이다. “방이 끝없이 가라앉았다. 그저 순환일 뿐이었다.” 소설은 독자가 상상력으로 채워가면서 읽으면 그만이지만 연극은 관객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무대 디자인, 조명 디자인의 역할이 큰 이유이다.
연극에서 미주는 네모난 무대에서 오르내리기를 반복하고 달린다. 마치 에셔의 ‘오르막과 내리막’(석판화, 1960)과 ‘폭포’(석판화, 1961)를 떠올리게 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에는 건물 옥상에 사각형의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이 있다. 미주는 그 사각형의 계단에 갇힌 채 달리고 또 달리는 듯하다. 폭포에는 수로를 따라 아래로 흐르는 물이 물레방아를 돌리고 그 물이 흘러가다가 처음의 위치로 돌아와 다시 물레방아를 돌리는 구조가 표현되어 있다. 아래로 흘렀던 물이 다시 위로 올라갈 수는 없지만 에셔의 폭포는 그 불가능한 세계를 마치 이 세상 어디엔가 있을 법한 모양으로 그리고 있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있는 모습이다.
연극 순환의 법칙은 원한 감정과 사적 보복에 노출된 삶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폭력의 문제를 무대화한 작품이다. 연극에서 보여주는 순환의 상상력은 계절과 자연의 순환이 아니라 비상구 없는 구조가 만들어낸 순환이다. 그것도 원한에 사로잡힌 채 질주하는 사람들의 순환이다. 이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들은 피해자의 위치에서 가해자의 위치로 자리를 바꾸는 경험을 간직한 사람들이다. 승자독식의 세상에서 각자도생해야만 하는 환경에 노출된 사람들이 피해자의 위치에서 가해자의 위치로 점차 자리를 옮겨가는 동안 사회는 폭력과 야만의 악순환을 거듭하게 된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경인일보 Copyright ⓒ kyeong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