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 ‘능력만능주의’ 만연

엘리트 부패, 배신감에 지탄받아

가정·학교서 이를 바로잡아가야

경쟁서 승리, 교육 목표돼선 안돼

류종하 주식회사 테라 대표
류종하 주식회사 테라 대표

‘인성’을 떠올리게 하는 시국이다. 최근 우리 삶에 충격과 불안을 조장한 사건들을 돌이켜보면 이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게 한다. 우리가 잘 알지만, 한편으론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인성을 일컬어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 심성과 지켜야 할 행동양식이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갖추고 지켜야 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종종 무시되곤 한다. 요즘은 더욱 그렇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 교수는 능력지상주의를 매우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면서 능력에 따라 부와 명예, 권력 등을 나누는 사회가 과연 공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을 던진다.

사실 우리 사회는 능력만능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상당수 기회가 능력 있는 자에게 돌아가고 있다. 인력 채용만 보더라도 여러 능력을 수치화해 높은 점수를 받은 자에게 일자리가 주어진다. 물론 잘못된 건 아니다.

하지만 부작용과 폐해는 있다. 이른바 ‘엘리트 집단’에서 발생하는 부정과 부패, 비리 등은 우리의 믿음을 저버렸다는 배신감에서 더욱 지탄을 받게 된다. 혹여 그들이 가진 능력에 당연히 인성이 포함돼 있으리라 여기기 때문은 아닐까? 남들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는 데 따른 책임감 정도를 기대한 건 아닐까?

인성은 능력과 다른 차원에 있다. 능력처럼 점수화하기도 어려우며 단기간에 평가하기도 어렵다. 다만, 인성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며 자기와 더불어 타인에게 주의를 기울일 줄 안다.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에 앞서 더 넓은 범주의 이익을 고려할 줄 안다. 인성을 갖춘 대인관계는 물 흐르듯 이어지고 사회는 법과 규정 없이도 공정한 사회로 향한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인성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다 보니 정의나 공정과는 어긋난 길을 가는 듯하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이런 흐름은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오히려 인성을 갖춘 사람이 손해를 보거나 무능력하거나 고지식한 사람처럼 취급된다. 오로지 능력만을 숭상하는 사회 풍조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이제 교육이 나서야 할 때이다. 교과서에서 아무리 인성을 떠든들 실상이 다르면 그저 이상에 그친다. 가정과 학교에서부터 이를 바로잡아가야 한다. 지금의 5060세대는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등장인물 엄석대를 기억한다. 엄석대란 인물 속에서 오늘날 능력지상주의의 폐해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한 개인의 끝없는 쟁취가 타인과 공동체에 피해를 주고 끝내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었다. 이처럼 경쟁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것이 옳다는 인상을 주는 교육은 버려야 한다. 경쟁에서 승리만이 교육의 목표가 돼선 안 된다.

학생 개개인 모두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우월한 능력을 인정받는 게 모든 가치를 초월하는 권력이라고 착각하지 않도록 길잡이가 돼야 한다. 과학영재나 수학영재만이 영재가 아니다. 이제는 인성 영재 교육이 필요한 때이다.

덴마크의 교육법이 언뜻 떠오른다. 덴마크에선 ‘얀테의 법칙’(Jante Law)이 마치 관습법처럼 통용된다. 개인의 우월감이나 자만을 경계하고 공동체 내 평등과 겸손을 중시하는 사회적 규범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모두가 일상에서 지켜야 할 10개의 조항도 있다. 요약하자면 ‘혼자 잘난 척하지 말라’는 얘기다. 자신이 타인보다 우월하다 생각하지 않고 타인을 업신여기거나 가르치려 들지 말라고 한다. 아마 어릴 적부터 받는 이런 교육이 덴마크가 우리에게 ‘행복한 나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인지 모른다. 그들에게 우리의 능력 경쟁은 한낱 부질없는 행동으로 비칠 수 있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사는 우리의 삶에 중요한 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적어도 능력이 삶의 바로미터가 아닌 건 분명해 보인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 기본 심성인 인성이 최첨단 기술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왜 필요하고 중요한지 곰곰이 되새겨봐야 할 것 같다.

/류종하 주식회사 테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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