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하늘대교·서해구 등 명칭 갈등 초래

주민 의견·시민의 뜻이라는 ‘마법 지팡이’

멋대로 휘두르면 공동체에 큰 상처 입혀

이충환 언론학 박사·객원논설위원
이충환 언론학 박사·객원논설위원

애당초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하 경제청)이 중심을 잡고 처리했으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했으면 저토록 심각한 시민 갈등을 초래하지 않았을 터이다. 사안의 주된 책임을 맡은 행정기관이 자신의 역할을 방기(放棄)하거나 책임을 회피(回避)할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를 속살 그대로 보여준 사례로 남게 됐다. 지난 14일 결국 국가지명위원회까지 불러내고서야 이름이 최종 확정된 인천 제3연륙교, ‘청라하늘대교’ 얘기다.

교량 건설 사업의 주체는 경제청이었다. 교량 명칭의 공식 결정은 인천시 지명위원회를 거치게 돼 있지만 사업의 성격과 내용상 경제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생각이 다른 여러 집단의 의견을 듣고, 이견을 중재하며, 하나로 뜻을 모아가는 과정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일 하라고 행정기관이 있는 것 아닌가. 당연히 경제청이 매듭지어야 했다. 그런데 슬그머니 뒤로 빠져버렸다. 자신과 해당 기초지자체 두 곳이 각자의 공모를 통해 2개씩 추린 명칭 6개를 몽땅 시 지명위로 넘겼다. 모양새는 중립적 참여였으나 실제 내용은 적극적 회피였다.

청라하늘대교는 지난해 경제청이 실시한 시민 선호도 조사에서 과반엔 미치지 못했지만, 2위와 큰 격차를 보였던 바로 그 이름이다. 중립의 의미는 여전히 모호한 채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인 결과가 됐다. 인천시 관계자는 국가지명위에 제출한 의견서에 “관계기관 협의와 법령에 따른 행정절차를 이행한 과정을 담았다”고 전했다. 경제청이 보여준 역할의 방기와 책임의 회피를 일목요연 정리한 것 아니면 뭘까. 문제를 역내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역외로 내밀어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지역사회 역량의 한계를 자백한 것 아니면 뭘까.

애당초 인천 서구청이 주도할 일이었다. 일의 특성과 규모가 그랬다. 그대로 진행됐으면 저리도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논쟁이 다시 불 지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행정체제 개편으로 오는 7월 검단구와 분리·신설되는 서구의 새 명칭 부여가 자칫 시기를 놓칠 수도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된 건 입법 권력의 과잉(過剩) 때문이다. 내 눈엔 몽니로도 보인다. 서구의 새 이름 ‘서해구’를 둘러싼 얘기다.

서구청은 지난해 세 차례의 여론조사를 거쳐 새로운 구 명칭을 확정했다. 마지막 조사에서 58.45%로 과반의 지지를 얻은 이름이다. 과정에 흠결이 없지 않았다. 공모전 1위가 적정성 논란 끝에 탈락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도 결론까지 이끌었다. 이제 새 법안이 마련돼야 한다. 서구는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협조를 얻어 입법하는 방안을 택했다. 그러나 의원 중 한 명이 주민공청회 개최를 요구하면서 급제동이 걸렸다. 지난해 2월 말 여론조사에서 ‘청라구’가 1위를 차지하며 유력 후보로 떠오르자 서구청 주도 하의 명칭 제정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다.

원칙이긴 하나 필수는 아닌 공청회 소식에 의원의 지역구인 청라국제도시 주민들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미 정해진 명칭을 바꾸려는 시도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이 지역의 상당수 주민은 ‘청라’가 자신들이 애써 가꿔온 브랜드임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구의 이름으로 확대 사용되는 걸 반대해 왔다. 다급해진 건 의원 쪽이었다. 설명문을 배포하면서 “입법과정에서의 주민 의견수렴 절차는 기존 행정절차에서 확정된 서해구 명칭의 주민 동의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해명했다. “여타의 명칭을 새롭게 재논의하는 과정이 아니다”라고 못 박기까지 했다. 이런 반응, 예상치 못했을까.

민의 수렴은 마법의 지팡이다. 아무 때나 참 편리하게 써먹을 수 있다. 누구라도 시시비비 따지기가 쉽지 않은 명분이다. 주민의 의견을 듣겠다는데, 시민의 뜻을 모으겠다는데 어떡하겠나. 하지만 아무리 마법을 부리는 지팡이라도 제멋대로 휘두르면 공동체에 큰 상처를 입히게 된다. 불필요한 갈등을 조장하고 후유증을 남기며, 더 요긴하게 쓰여야 할 사람과 돈의 가치를 소모한다. 진정성 있는 행정이나 깊이 있는 정치는 이런 마법의 지팡이를 함부로 쓰지 않는다. 진짜 민의를 얻기 위해 그 어디쯤 마땅히 서야 할 자리를 알기 때문이다.

/이충환 언론학 박사·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