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수장가 낭선군 이우
예술과 기록으로 시대 증언
‘동국명필’ 편찬·회화 수집
개인 취향 아닌 체계적 노력
포천시 영중면에 위치한 인흥군 이영(1604~1651)의 묘역은 17세기 종친 문화의 한 단면을 물리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묘비에 새겨진 글씨와 주변 석물은 그저 상장례 유적이 아니라, 당대 왕실과 선비들이 공유했던 기록과 기념의 방식이 응축된 결과물이다. 이 묘역은 인흥군의 장남이자 17세기 수장가 낭선군 이우(1637~1693)의 문화적 지향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된다.
역사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전개되기도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한 사람의 선택이 오래 남기도 한다.
조선시대 서화애호의 역사에서도 그러한 인물이 있다. 15세기 안평대군이 그러했다면, 17세기에는 단연 낭선군 이우다. 그는 왕족이었지만 정치의 전면에 있기보다 예술과 기록을 통해 시대를 증언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낭선군은 선조의 손자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의 혼란을 겪은 세대에 속한다. 당쟁이 격화되던 시기 그는 권력 대신 문화에 집중했다. 역대 임금의 글씨와 글을 모아 ‘열성어필’과 ‘열성어제’를 간행한 일은 전쟁 이후 흩어진 왕실의 기억을 다시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왕실 자료를 정리하고 보존하는 일은 평범한 취미가 아닌 무너진 시간 위에 나라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일과 마찬가지였다.
그의 진정한 독창성은 전국에 흩어진 옛 비문을 탁본해 엮은 ‘대동금석서’에서 드러난다. 오래된 비석과 묘갈에 새겨진 글씨를 탁본해 모은 이 금석첩은 우리나라 최초의 체계적인 금석문 집성이다.
이는 가장 오래된 것에서 진리를 찾으려 했던 당시의 고학풍과 맞닿아 있다. 동시대 문인들처럼 낭선군에게도 문자는 읽는 대상이면서 시간을 품은 흔적이었기에 그는 글의 의미뿐 아니라 돌 위에 남은 필획 자체를 역사로 인식했다.
이 때문에 그는 역대 명필의 글씨를 모아 ‘동국명필’을 만들었고, 남은 몇 줄의 글씨라도 돌에 새겨 전하려 했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회화를 폭넓게 수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고려 공민왕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천산에서의 사냥’을 비롯해 연행 중 구입한 명대 회화들은, 그가 과거와 현재를 함께 보존하려 했던 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낭선군의 이름은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방대한 컬렉션은 후대에 흩어졌고 일제강점기에는 상당수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지금도 그가 모은 금석첩과 서화는 해외에서 잠들어 있다.
동서양 모두 한 개인의 선택으로 시작된 수집이 한 시대의 문화를 증언하는 기록이 되었음을 생각하면 이는 개인의 불운을 넘어 우리 문화사의 손실이다.
낭선군 이우는 묻혀 있지만 역사 속에서 사라진 인물이 아니다. 그의 수집과 편찬은 단순한 개인적 취향이 아닌 한 시대의 예술과 문화를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이었다. 오늘날 그의 작업이 남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디에 무엇을 남기고,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황정연 한국학중앙연구원 조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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