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 단순 신형 함정 아닌
전술 환경 대응 실질적 전력
승리·전쟁 종결 흐름 만들어
위기 해답 늘 현장에 있을 것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각종 문헌과 유물, 주요 해전의 전개와 결과를 통해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대응을 정리한 이순신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는 이순신의 해전과 그 성과를 중심으로 구성돼 관람객들로 하여금 그의 우국충정과 헌신을 되새기게 한다.
다만 연구자의 시선에서 보면, 해전의 승리 이면에 존재했던 사전 준비와 판단의 과정, 특히 전쟁 발발 이전의 행적은 상대적으로 충분히 조명되지 못한 아쉬움도 남는다.
조직이 위기를 맞을 때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문제를 바라보는 지도자의 방향이다. 환경과 조건은 시대마다 달라지지만, 위기 앞에서 판단이 출발하는 지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그 출발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이순신의 왜적 침략 이전 행적이다.
1591년 2월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이 마주한 조선 사회와 수군 조직에는 이미 균열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문란해진 군역 제도와 불공정한 행정 관행은 민심을 약화시키고 있었으며, 수군의 대비 태세 또한 지역과 부대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그는 외부 정세를 단정하기보다, 먼저 조직 내부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상태인지부터 점검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기존 전력의 구조적 한계를 분명히 인식했다. 판옥선 중심의 전력만으로는 다가올 위기에 충분히 대응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방안으로 거북선 건조를 추진했다. 거북선은 단순한 신형 함정이 아니라, 새로운 전술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실질적 전력으로서 훗날 해전의 흐름을 바꾸는 게임체인저 역할을 했다.
이순신은 예하 수군진을 빠짐없이 직접 순회하며 군기와 훈련, 장비와 경계 상태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대비가 충실한 부대에는 공개적으로 격려와 신뢰를 보냈고, 준비가 미흡한 진에 대해서는 책임을 분명히 했다. 형식적인 보고보다 현장의 실제 상태가 판단의 기준으로 자리 잡은 것도 이 시기였다.
이러한 준비는 임진왜란 첫해부터 곧바로 성과로 이어졌다. 이순신의 함대는 조선 수군의 주력으로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남해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이는 전쟁 발발 이후의 즉흥적 대응이 아니라, 발발 이전에 축적된 현장 점검과 준비가 실전에서 작동한 결과였다.
정유재란을 앞둔 1596년에도 그의 선택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산도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직 중이던 그는 일본의 재침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전라도 연안은 물론 내륙 깊숙한 지역까지 직접 순회하며 행정 실태와 군수, 동원 체계, 민심을 점검했다. 이러한 내륙 순시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칠천량해전의 참패로 수군이 붕괴된 뒤, 다시 통제사로 복귀했을 때 남아 있던 전선은 13척에 불과했다. 이순신의 지략과 하늘의 도움으로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했지만, 13척 조선 함대 현실은 전쟁을 종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전국이 황폐화되고 민심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함대 재건은 쉽지 않은 과제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이전 현장 점검 과정에서 형성된 민과 관과의 신뢰는 이 시점에서 힘을 발휘했다. 이순신이 목포의 고하도와 완도의 고금도에 사령부를 두고 수군 재건에 나서자, 지역의 지방 관리들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호응했다. 군량, 선재 및 병력이 모였고 장정과 장인들은 함선 수리와 신규 건조에 참여했다. 그 결과 조선 수군은 점차 전력을 회복해 노량해전 시점에는 약 85척 규모로 증강될 수 있었다.
임진년의 연전연승과 정유재란 이후의 조선 함대 재건, 그리고 노량해전의 승리와 전쟁 종결은 개별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흐름이었다. 왜적 침공 이전에 반복된 현장 확인과 준비의 축적이 그 흐름을 만들었다. 이러한 사전적 대응과 현장 중심의 판단은 오늘날 각계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지도자들에게도 충분한 시사점을 전해준다. 결국 위기의 해답은, 그때도 2026년에도 늘 현장에 있을 것이다.
/고광섭 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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