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당원을 이성적 시민이 아닌
달콤한 말에 현혹될 존재로 전제
무시와 불신이 이면에 숨어있어
‘아니오’라고 말할 용기 가져야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전 6세기경 시작된 민주주의(demokratia)는 인민(demos)에 의한 통치(kratos)를 의미한다. 왕정이나 귀족정이 대세였던 시대에 다수의 인민이 주도적으로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정치체제는 혁명적인 실험이었다. 민주주의는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다. 인류 역사 전체에서 보면 민주주의는 매우 제한된 시기와 공간에서만 나타난 예외적인 현상이지만, 어쨌든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의 전성시대에 살고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2항이 잘 보여주듯,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 권력의 정당성의 근거를 국민에게 두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하지만 권력의 주체인 국민의 뜻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더 나아가 ‘국민은 항상 옳은가’라는 질문에 이르면, 이 문제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 역사는 길게 보면 인민의 승리의 역사이지만, 그렇다고 실패의 경험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특히 인민의 열정이 과도하게 분출될 때 공동체 전체를 파괴적인 상황으로 몰아간 사례가 적지 않다. 아테네 민주정 몰락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민회의 시칠리아 원정 결정, 히틀러에게 열광하며 전체주의에 동조한 독일 국민은 대표적인 예다.
최근 우리 정치에서는 ‘국민주권’이라는 말이 특히 자주 등장한다.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를 표현하는 용어로서 그 자체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무분별하게 남용될 때 이야기는 달라진다. 모든 정치적 사안에 국민주권을 들이밀기에는 현실 정치가 지나치게 복잡하다. 그리고 흔히 오해되는 것과는 달리 국민주권이 모든 사안을 국민이 직접 관여하고 결정해야 된다는 의미도 아니다. 국민주권의 지나친 강조와 포퓰리즘, 더 나아가 독재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역사 속에서 여러 번 목격했다.
국민주권, 인민주권의 신성화는 거의 어김없이 소수자 배제와 정치 양극화로 이어진다. 국민이라는 이름이 전체를 포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권력을 잡은 쪽은 항상 누가 진정한 국민인지를 정하려는 욕망을 억제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이민자, 사회적 약자, 소수세력은 주변화되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 정치 분열이 심한 지금 국민주권이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주권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 부적절한 ‘당원주권’이라는 표현이 함께 유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정당에서 당원의 의사가 중요하고 최종적인 심급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 자체는 존중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순간 위험해진다. 특정 종교세력이나 특정 정치 지도자의 팬덤에 의해 당원의 ‘순수성’이 얼마든지 오염될 수 있는 것이 오늘 한국 정당정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서 강조되는 국민주권, 당원주권은 국민과 당원을 진정으로 존중한다기보다 그들에게 아부하는 것에 가깝다. 국민과 당원을 이성적 시민이 아니라, 달콤한 말에 쉽게 현혹될 존재로 전제하는 무시와 불신이 그 이면에 숨어 있다. 정치인이 국민에 대해 진정한 존중을 갖는다는 것은 양자 사이에 일정한 긴장 관계가 유지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국민에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국민이 모든 것을 직접 결정하는 직접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전부가 아니다. 민주주의가 모든 정치적 결정을 좌우하는 절대적 기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국민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책임지지 않는 정치, 감동을 주지 못하는 정치, 사소한 정쟁에 매몰된 정치는 국민이라는 이름 뒤에 숨는 정치 지도자들의 비겁함에서 파생된 결과다. 인민에게 쓴소리를 할 줄 알았던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오히려 아테네 민주정의 최전성기를 열었다는 사실을, 지금 한국 정치인들이 다시 떠올려야 할 때다.
/신철희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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