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 수단이자 가치의 척도 ‘돈’

인간 사회의 약속이 제도화 된것

현금 퇴장에 화폐 소재 바뀌어도

변치 않는 기저 흐름 ‘믿음·관리’

장정석 한국은행 경기본부장
장정석 한국은행 경기본부장

지난 칼럼에서 중앙은행의 시선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여러분과 나누었다. 새로운 주제로 사람과 돈에 대해 얘기해보려 한다.

돈이란 무엇인가? 흥미롭지만 막상 답하려면 꽤 난감하다. 누군가에게 생계의 수단이고, 가치의 척도이며, 또 다른 이에게는 계좌 속 숫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본질을 따져보면 돈은 인간 사회의 약속, 곧 ‘신뢰’가 제도화된 형태다. 경제학 교과서가 말하는 교환의 매개, 가치의 척도, 가치의 저장이라는 기능도 신뢰가 유지될 때만 작동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1970년 아일랜드 은행 파업이다. 당시 약 6개월간 모든 상업은행이 문을 닫았다. 수표 청산이나 현금 인출이 불가능한 금융마비가 우려되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경제는 붕괴되지 않았다. 이는 상점과 기업들이 개인 수표를 은행 지급 보증 없이 순전히 발행인의 신용(즉, 약식 차용증)만으로 현금처럼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개인 수표는 은행 시스템이 아닌 공동체와 개인 간의 상호신뢰라는 기반 위에서 교환의 매개 기능을 수행했다. 아일랜드인들이 동네 선술집을 중심으로 서로의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신뢰유지가 가능하였다는 해석도 있다. 이처럼 돈은 타인에 대한 믿음이 작동할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유지된다.

주목할 점은 신뢰 기반의 교환은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흡혈박쥐나 침팬지 등 일부 동물 사회에서도 지연된 호혜성(delayed reciprocity), 즉 ‘나중에 돌려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바탕으로 주고 실제로 돌려받는 행위’가 관찰된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의 결정적 차별화 지점이 있는데 그것은 호혜성을 돈이라는 제도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인간은 이 관계를 서로의 기억에 맡기지 않고 기록하고 규칙으로 만들며 제도화했다. 기호는 이러한 전환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기호가 문자로 발전하면서 약속은 누적되고 신뢰는 개인적 관계를 넘어 사회적 질서가 되었다. 돈은 문자와 결합하며 문명의 핵심 장치로 자리 잡았다.

최근 돈의 모습은 다시 크게 바뀌고 있다. 현금은 사라지고, 월급은 봉투가 아니라 계좌 속 숫자로 들어온다. 카드와 간편결제, 디지털화폐 흐름 속에서 지폐와 주화의 사용이 점점 줄어든다.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동전’이다. 최근 동전 사용이 급격히 줄면서 2018년에 주조된 주화가 아직도 시중에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처럼 돈으로 쓰이지 못한 화폐가 오히려 수집가들 사이에서 귀한 ‘수집물’이 되고 있다. 한때 교환의 매개였던 실물 화폐가 귀금속처럼 점차 기념과 투자 대상으로 이동하는 장면이다. 과거 금화와 은화가 교환의 매개로 사용되며 신뢰의 상징이었다가 역사 속으로 물러났듯이 지금은 주화가 그 길 위에 있다. 돈의 물질적 껍질은 사라지지만, 그 본질인 신뢰는 물성과 상관없이 더 넓고 깊게 확장된다. 예전에는 손에 잡혀야 믿었지만, 지금은 계좌 속 숫자만으로도 서로 믿고 거래한다.

신뢰의 다른 이름은 부채이다. 나의 자산은 언제나 누군가의 빚이라는 사실은 돈의 본질이 지닌 또 하나의 역설이다. 이 빚을 감당할 수 있다는 타인의 믿음이 확장될 때 경제는 성장하지만, 그 믿음이 무너지면 위기는 순식간에 찾아온다. 금융위기와 통화불안은 언제나 부채가 과도하게 팽창한 뒤 붕괴되는 지점에서 발생했다. 중앙은행 제도가 고안되면서 이러한 불안은 일정 부분 완화될 수 있었다. 신용이 과열될 때 금리 인상 등을 통해 팽창을 억제하고, 위기나 통화 불안 시 최후의 안전판 역할을 통해 신뢰를 지켜냈다.

돈의 역사는 소재의 변화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기저의 흐름은 신뢰의 확장과 관리의 역사이다. 금속이든, 종이든, 계좌 속 숫자이든 돈은 언제나 ‘타인이 나에게 갚을 것이라는 믿음’ 또는 ‘내가 타인에게 갚는다는 신뢰’로부터 작동해왔다. 앞으로의 돈도 다르지 않다. 국가, 기업, 개인의 신뢰가 데이터로 기록되고 거래의 기초가 되는 시대에서 돈의 미래는 그 신뢰를 얼마나 투명하게, 그리고 깨지지 않도록 안전하게 제도화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장정석 한국은행 경기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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