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가 생겨 여행 겸 떠난 제주행

딸 동행에 첫걸음마 모습 겹치고

함께 했던 친구·학생 등 기억 나

주름같은 시간 모으니 인생의 무늬

김성중 소설가
김성중 소설가

딸과 함께 제주에 다녀왔다. 이틀간 강의를 할 일이 생겼는데, 거기에 하루를 더 붙여 일도 하고 여행도 할 생각으로 일정을 짰다. 전부터 이런 식이었다. 제주에서 일거리가 생겨 돈을 벌면 그것을 경비 삼아 여행을 좀 더 하고 돌아오는 식이다.

모처럼 제주공항에 도착하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주에서 보낸 시간의 조각을 모아 놓으면 그것도 내 인생의 지표를 보여주는 그림이 되겠다고. 대학 친구와 이 섬에 처음 온 것은 이십대 후반이었다. 여느 관광객처럼 일주버스를 타고 한 바퀴 돌고 성읍 민속마을에서 오미자차를 마셨다. 돌담, 야자수, 멀리 보이는 한라산과 크고 작은 오름들이 아무리 봐도 여상해지지 않았다.

두 번째 방문은 신인작가 시절 글 쓰는 친구들과 함께였다. 동화작가 친구가 근사한 제안을 했다. 애월 해변에 동화작가들끼리 일년 동안 연세를 나눠 내고 작업실로 쓰려고 빌려놓은 아파트가 있다는 것이다. 나와 또 다른 소설가 친구는 당장 짐을 싸기로 했다. 아침마다 나란히 체조를 하고 식사를 한 다음에 도서관에 가거나 일렬로 놓아둔 책상에 앉았다. 그런데 글은 ‘나란히’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동화작가는 일주일만에 절필(?)을 선언했다. “나, 문학 방학할래.” 그러고는 훌훌 여행을 떠났다. 소설가들은 그런 배짱이 없어 한 명은 주간으로, 한 명은 야간으로 글을 썼다. 올빼미 모드로 지내던 나는 바다와 마주하는 책상에 앉아 가로등처럼 불을 밝히는 고깃배의 등불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어부의 노동과 나의 노동이 마주보는 느낌이 들어 밤을 새도 쓸쓸하지 않았다.

그 다음 제주를 올 적에는 결혼을 해서 가족이 생겨났다. 서귀포 귤밭 한가운데 작가 레지던스로 내주는 집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남편과 딸과 함께 한달살이를 했다. 한라산이 보이던 그 집에서 딸은 첫 걸음마를 했다. 한편 도서관에 간 나는 사서 선생님과 친해져서 제주도 도서관 대출증까지 만들었다. 사서 선생님은 아이가 네 명인데 육아와 교육에 대한 고민 끝에 제주도에 내려왔다고 했다. 차도 없는 우리 가족이 유아차에 아이를 태우고 산책을 나가면 동네 할머니들이 햇빛을 가려줘라 담요를 더 덮어줘라 잔소리를 빙자한 다정한 말 걸기를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공천포, 위미에 단골 카페가 생겨났고 오일장에서는 항상 같은 집에서 과일을 샀다.

이 시간이 너무 좋아서 한 번 더 제주도에 한달살이를 했다. 그 사이 운전면허가 생긴 나는 집에서 완도까지 다섯 시간 정도 걸리는 장거리 운전을 했다. 완도에서 배에 자동차를 싣고 제주에 도착하자 스스로에게 초보운전 딱지를 떼도 될 것 같았다. 4주간 제주대학교에서 글쓰기 강의도 했는데, 숙제를 왕창 내주어도 꼬박꼬박 열심히 해오던 학생들 때문에 신이 나서 강의한 기억도 좋았다.

세화에 살던 친구네가 함덕으로 이사를 갔을 때, 새 책의 원고 정리를 위해 그 집에 일주일가량 머문 적도 있다. 서우봉에 올라가 일몰을 보거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보는 시간, 가족 없이 오롯하게 혼자 보내는 제주의 시간도 마음의 필름에 선명하게 담겨있다.

이번에는 딸과 함께 서우봉에 올라갔다. 함덕의 키 큰 야자수를 보자 마음이 뻥 뚫렸다. 아라리오 갤러리에 가서 작품도 보고 이호테우 해변의 목마도 사진에 담았다. 내 맞은편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딸을 보자 첫 걸음마를 하느라 애를 썼던 모습이 겹쳐서 떠올랐다. 그 순간이 기억의 스위치를 눌러 제주에 함께 왔던 친구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 제주대학 학생들, 도서관과 서점에서 만난 책들, 이십대와 삼십대와 사십대의 내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대부분 강의나 원고를 껴서 지냈던 시간이기 때문에 일상과 여행의 중간지대쯤으로 살아왔는데, 그건 그 나름의 패턴을 갖추고 있었다. 섬에서 잠깐 열렸다가 닫히는 그 주름 같은 시간들만 모아도 내 인생에 또 다른 무늬를 읽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떠나올 때 눈발이 날리며 동백이 하얀 세상에 붉은 점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앞으로 만들어갈 시간도 당겨서 기대하면서, 짧고 아쉬운 겨울여행을 마쳤다.

/김성중 소설가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